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by 푸른향기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내일이 왔습니다

잠 못 드는 시간을 견디며

새벽을 대낮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흰 절벽 같던 내일이 오늘이 되어

더디게 왔습니다 찬란하고도 서늘하게

베토벤을 한 시간 넘게 듣습니다

스물 여섯부터 서서히 귀가 멀어갔다는 천재

그가 살았던 동네에 가면

서른 살 베토벤의 청력으로 들리는 음악과

마흔 살 베토벤 청력으로 들리는 음악을

순서대로 들을 수 있다네요

캄캄한 세계를 짚어내는 음계를 따라가면

다른 아픔으로 들어가는 장력이 생길까요

희미해질수록 강해지는 주제의 변주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음악을

불구의 몸처럼 엿듣다 보면

어느 꼽추가 일으키는 허리뼈도

해거름 노을을 떠받치는 능선이 될까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내일이 저물어갑니다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내 잠은 점점 옅어져 가고

돌아누우면 닫히는 세계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노을이 자꾸 물가를 쓰다듬어

어제보다 얇아진 갯벌의 입술

그제보다 얇아진 갯벌의 물기

점점 들리지 않는 소리라 했나요

칠게들이 부지런히 뻘을 들어 올립니다

사라지는 소리를 흘려 썼던 악보처럼

밀려 나는 포물선 위로

검은 음표 하나 앉았다 날아오릅니다






잠을 못 잘 때가 많다. 아니, 잠을 못 잘 때가 많은 게 아니라 잠을 못 잘 때가 있었다. 몇 번 잠을 못 잤다는 생각 때문에 쉽게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 아니, 쉽게 잠에 빠져들지 못할 때가 있다. 드문드문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드문드문 일어나는 현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병이다. 잠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만 그럴까.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나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것이 갱년기 증상이라면, 갱년기가 끝나면 다 나아지겠지. 갱년기라는 건 인생을 다시 살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데, 인생을 다시 살기 위해서는 이런 신체적 변화가 필요한 일일까. 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확 관점을 바꾸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무엇이 조금씩 여려질 때, 세상의 아주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진 않을까. 세상에는 내 안이 너무 강하서는, 내 안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커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으니까.


내가 아플 때 남이 아픈 것을 알아가는 것처럼, 내가 아플 때라야 남의 아픔을 혈맥처럼 짚어 내려갈 수 있다.


베토벤은 귀가 아팠다. 그는 평생 잘 안 들리는 청력을 떠안고 소리의 궁극을 끌어올렸다. 우리는 그의 고통 덕분에 듣는 호사를 누리며 행복하다. 점점 사그라드는 청력을 뚫고 웅장한 음악이 완성되는 것처럼, 점점 얇아지는 갯벌 위로, 잠 한 마리 철새가 날아오른다. 그 풍경이 하루를 완성한다.


점점 얕아지고 점점 짧아지는 나의 잠, 물결처럼 밀려나는 날마다의 잠 사이에 날아오르는 게 분명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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