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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13. 2021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청소년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시 한편씩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시가 어렵다고 알고 있지만, 청소년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은 재미있고 아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다. 아이들은 킥킥대며 "이것도 시예요?", "막 욕이 써져 있어요" "선생님, 야해요~~" 라는 말을 뱉으며 한 시간도 못되어 한 권을 훌떡 읽어 내려간다,

 한 아이가 '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학교에서 똥을 싸버려서 집에 갔다 왔다는 내용이었다.  띄엄띄엄 시를 읽고 몇 마디 감상을 덧붙이고 발표자가 들어갔는데 느닷없이 듣고 있던 아이가 뭐라고 뭐라고 중얼댄다.


- 뭐라고 하는 거야. 야, 정식아 좀 크게 말해봐 뭐라고?

- 저도 그런 적 있다고요...

- 뭐?

- 저도 학교에서 똥을 싸버린 적이 있어요

- 엉?

- 초등학교 3학년 때, 화장실까지 갔는데 문 열기 전에 똥이 나와버렸어요

 정식이는 그 날 그 사실을 담임선생님께 말했단다. 그래서 담임샘이 쉬쉬하며 뒤처리를 해주었는데, 문제는 그대로 학원까지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학원은 하필 태권도 학원이라서 도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판. 정식이는 아이들 틈에서 따로 빠져나와 몰래 도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아랫 도복 속은 노팬티였다는 것. 헛헛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을 정식이의 그 태권도 시간이 떠올랐다.

 

 - 그때는 엄청 창피했는데,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는데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  지금은 안 창피한 거야?

-  네!  

 정식이가 자신 있게 네!라고 하자 맞은편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큰 소리로 말한다.

- 샘, 저도 그런 적 있거든요? 저도 초등학교 때 팬티에 똥을 지린 적이 있어요. 그때 담임샘이 팬티를 갖다 주셨어요


 갑자기 양쪽에서 똥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 풍경이 참 낯설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막 난리가 난 것처럼 떠들썩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모두 19명. 똥을 쌌다고 고백하는 정식이 둘레로 두세 명, 또 나도 그랬노라고 덩달아 고백하는 여자 아이 주변 두세 명, 그리고 그 중간에 서 있는 나. 그렇게만 조용한 요동이 있을 뿐이었다.  선생인 내가 가장 놀라고 흥분한 처지였는데, 말하는 두 아이만 새로운 것을 발표하는 것마냥 조금 상기되어 있었을 뿐, 다른 아이들은 별 요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시 학교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 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이며 온갖 야유와 괴성이 터져 나왔을 텐데... 아이들은 '너가 그런 적이 있었냐?' 하는 그저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긴 이곳 섬마을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같은 교실에서 지내왔으니 새로울 것이 없고 똥 같은 얘기도 별 놀라운 일이 아닐 것 같긴 했다.

 

 나는 똥 싼 아이들의 고백보다 정작 무덤덤한 다른 아이들의 반응이 신기했는데, 더 신기한 건 그다음 국어시간부터 달라진 정식이의 도였다. 늘 까불고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해대서 수업방해를 놓던 정식이었다. 그런 정식이가 책을 펴놓고 가만히 앉아서 필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꽤 열심히 하는 모양을 짓는 것이었다. 순간의 변화인가 싶어 몇 날을 가만히 지켜보았는데, 그 변화가 하루만의 것은 아닌 듯싶었다.


 감춰 두었던 부끄럼을 말해버려서 그런가, 아니면 저의 속마음을 들어주어서 그런가. 어쨌든 정식이는 그 날 이후로 좀 더 당당해지고 또록또록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 그건 나의 변화였다. 까불고 말 안 듣고 몸을 나대고 하는 정식이를 못내 못마땅하고 밉게 보던 나의 마음이 다 녹았다는 사실이다. 그날 고백 이후로 정식이가 귀엽고 이쁘고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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