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향기 May 12. 2021

5월의 야외수업

언제부터 데리고 나가야지 나가야지 했는데 오늘에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늘은 5월 12일. 아침 일기예보로는 서울 기온이 29도를 오르내리고 이곳 섬마을 기온도 27도라 했다. 마침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다. 하늘을 보니 파랗고 신록은 꽃처럼 예쁘다. 


 19명 아이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시를 쓴다. 잔디 운동장에 벌렁 누운 아이들이 서너 명, 구령대 국기 밑에 대여섯 명, 운동장 벤치 안에 또 대여섯 명... 

 - 또 저번처럼 후다닥 써서 다했다고 하지 말고, 좀 생각을 해서 써 봐.

- 보이는 거, 겪은 거, 늘 고민하고 있는 거... 이런 것을 솔직하게 써 봐.

 선생의 요구가 길었다. 

- 저는 고민이 없는데 어떻게 써요?

- 보이는 것을 시로 쓰는 건 너무 어려워요...

 아이들은 불평을 하면서도 종이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쓴다. 시 백일장 대회라 이름 붙여놓고 상품도 걸었다. 최우수상에 노트 1권과 과자 한 봉지, 우수상에 노트 1권과 보리과자 2봉, 장려상 2명에게는 보리과자 1봉!! 꼭 과자를 먹고 싶어서 열심히 쓰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19명이 도망 안치고 잘 있나 스탠드에 앉아서 둘러보고 화단 앞을 서성이기도 하고, 운동장 밑으로 내려가서 아이들 쓴 곳으로 가까이 가보기도 한다. 바람이 차다. 오늘따라 얇은 옷을 입고 나왔다. 분명 일기예보로는 27도라 했는데... 하늘은 맑고 햇볕은 뜨거운데 바람 끝이 차갑다. 섬에는 바람이 항상 분다. 막아주는 게 없어서 그런가. 바다 위에는 항상 바람이 들끓고 있다는 말인가. 바닷바람이 막힘없이 내질러 오는 모양이다. 관사에 들어가서 겉옷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수업을 하다가 관사에 잠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것이 이 동떨어진 섬마을 학교의 장점이다. 


- 선생님 뜨거워 죽것어요

- 햇빛이 너무 따가워요, 들어가고 싶어요, 들어가서 하면 안 돼요?

 열심히 하던 아이 몇 명이 쫓아와서 투덜댄다. 맑고도 좋은 날씨를 기다렸다가 나왔는데 오늘은 햇빛이 너무 뜨겁다. 그동안 꽃샘추위, 황사, 미세먼지 주의보, 강풍, 난데없는 소나기 등등 궂고도 흐린 날이 많았는데, 정작 맑다고 한 날씨는 햇빛이 이렇게 강하구나. 오히려 흐린 날씨가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에는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교실 안에서 바라보면 환한 운동장이 참 좋았는데. 안에서 내다보면 햇빛 쏟아지는 밖이 참 환하고 좋았는데. 그런데 햇빛 속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인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운동장 잔디밭에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나무 그늘로 들어가 있다. 새들이 나뭇잎 속을 파고 들 듯이 아이들은 어느새 그늘을 찾아 구석구석 들어가 있다.


    <싫어>

겨울이다! 아 너무 추워

난 겨울이 싫어

여름이 언제 올까?


여름이다! 아 너무 더워

난 여름이 싫어

겨울이 언제 올까?


싫어 싫어 추운 겨울

싫어 싫어 더운 여름


 시작한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한 아이가 다했다고 가져왔다. 뭐 생각을 깊이 하고, 경험을 떠올려보고, 보이는 것을 찾아보고, 그런 말들이 다 소용없다. 아이들은 그저 더울 뿐이다. 이 시를 쓴 아이는 따가운 햇빛 때문에 벌써 여름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하기는 이것이 그 아이의 현재의 가장 솔직한 얘기겠지. 초딩같은 시라고 핀잔을 주면서 너는 이제 중학생이니 이런 시 말고 생각이 들어있는 시를 쓰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이는 당면한 느낌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순식간에 해결한 것은 한 아이만이 아니었다. 

 -선생님 저 잘 썼지요?

- 선생님, 저는 너무 완벽하게 쓴 거 같아요

 주절주절 대면서 종이를 내고 아이들은 내빼듯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수학 시간에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시간에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처럼 국어시간에 시를 쓰라하니 또 그냥 한 편의 시를 쓴다. 별 고민없이 별 생각없이. 순간에 드는 느낌을 일필휘지로 갈겨쓰는 것처럼. 그냥 오늘은 오늘이고 그냥 햇빛은 햇빛이고 그냥 바람은 종이가 날아가도록 불 뿐인데 선생님은 이걸 가지고 무슨 시를 쓰라는 건지...마음을 쓰라고 하는데 난 마음이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제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다. 아직 덥혀지지 않은 바람이 지나고 있고 그 아래로는 뜨거운 햇빛이 내려앉고 있다. 조금 있으면 이 차가운 바람과 햇빛이 잘 섞어져서 뜨거운 공기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다 들어간 운동장은 다시 햇빛과 바람만 남았다. 참 조용한 한낮이 지나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 지우개를 돌려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