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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Dec 16. 2021

늦깎이 주말부부

  새가 운다. 유채꽃이 가득 찼던 논바닥에 물이 고여있다. 곧 모내기 철이다. 슬로우 시티 천사섬,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는다. 교문 입구에 '코로나 19를 이겨낼 학생과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신안군 교육청이 배부한 프랑이 결려있다. 아이들은 몇 명 안되지만 운동장은 옛날 학교처럼 무지하게 넓기만 하다. 버려진 땅에는 무화과 싹이 돋는다.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들어온 섬이다. 물론 다리가 놓아져 있어서 1시간 정도면 들어올 수 있지만 어쨌든 여기는 짠내 나는 섬이다.


 -이제 잘 갔는지, 연락도 안 하네? 궁금하지도 않나봐?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내가 먼저 내 말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 나 잘 왔어, 자기도 출근 잘했지?, 이렇게. 내 말을 하기에 앞서 항상 상대방의 빈 구석을 찾아내 나를 메꾸려고 한다. 나 잘 왔어, 자기도 출근 잘했지? 이렇게 살갑게 물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점검해서 내가 상대방의 마음속에 잘 있는지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단순하게 건너갈 말이 자주 꼬이고, 잘못하면 되돌아온 말 때문에 하루 내내 속이 끓어오를 때도 많았다. 이제 와서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습관적으로 또 내숭을 떨고 말았다.


- 우리 식구들 오늘 하루 고생했어~ 저녁 잘 쉬고 푹 자고 내일도 잘 살자~~

남편이 가족 카톡방에 남긴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이름도 불러가며 잘 지냈냐고 하더니, 어제는 식구라는 말로 뭉뚱그렸다. 내가 한마디 끼어들 새도 없이, 아들들이 '네, 아빠도 잘 쉬어요~~" 등등하며 하루 저녁이 마감되었다. 나는 남편이 식구 운운하며 한꺼번에 보내는 것 말고 따로 나에게 문자나 카톡을 보내주길 원했다. 부부끼리 할 말이 있고 아이들과 같이 할 말이 따로 있는데, 나한테 따로 말하지 않는 건 이제 나에게 할 말은 없다는 거 아닌가?


 그런데 문자는 그렇게 보냈지만, 따로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편안함이 있다. 점점... 굳이 잘 잤냐고 묻지 않아도 나는 잘 자고 있음을  내 스스로 확인한다. 남편이 물어봐 주지 않아도 내 자리가 확인되는 안전함이 있다. 권태기인가? 아니다.  이제는 구질구질 말 안 해도 존재 자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또는 '나를 사랑했었다'라는 명제의 은유가 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지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혹은 사랑하지 않는 건 문제가 아니야!라는 정답 같은 진리가 조금씩 내 마음에 들어오고 있다.


 수없는 사랑의 구걸과 확인과 체념과 다짐과 기대와 실망과, 또 가져보는 안락함 속에 은근히 올라오는 긍정... 그리고 다시 시작되곤 하는 분노와 애증...

 남편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본인 말대로 '나 같은 사람도 없다'라고 늘 말할 정도로 집안일도 잘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설거지는 물론이고, 아이들 어렸을 적엔 교복을 매주 손빨래해주고 신발까지 빨아서 깔깔하게 말려주곤 했다. 그렇지만, 나는 늘 불만이었다. 퇴근을 너무 정확히 하는 것은 내 시간을 갖지 못해서 불만이었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도량이 넓지 못해서 불만이었고, 집안일을 잘하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하는 잔소리가 많아서 불만이었다.

 가스불을 잠가라, 전등을 왜 쓸데없이 켜놓냐, 냄비를 반듯하게 놓아라, 보일러 기름을 아껴라, 휴지를 왜 그리 많이 쓰냐, 물건을 아껴 써라, 등등...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서 눈덩이 같은 불만이 되었고, 화약에 성냥불을 갖다 대면 확 일어나는 불길처럼 나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폭발되곤 했다. 또 그 폭발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둘의 시간을 침묵이 대신할 때가 많았고, 어쩌다 그것은 우연한 친구의 방문이나, 시간이 한참 무르익어 서로 감정이 풀어지고 연해졌을 때에 한두 마디 말을 건네보는 것으로 풀어지곤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기 이렇게, 한갓진 섬에 와서 남편의 반응에서 조금 놓여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어제 잘 잤냐고, 별일 없냐고, 출근 잘했냐고, 서로 묻지 않아도 별 서운함도 미안함도 안 드는 경지에 이른 것!

 조금씩 내 감정에 있어 내가 주인이 되는 느낌이랄까. 이제서야 조금씩 남편의 감정에서 놓여나는 기분이랄까.

 늘 남편의 기분이 좋아야 내가 좋았던 굴레에서 조금 벗어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스스로 섬 학교를 지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럼 남편은 어떻게 하고? 혼자 밥 해 먹게 두는 거야??"라고 남편의 안위를 걱정해줄 때, 내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해방의 기쁨을 미리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살았지? 그런데 사실 남편도 은근히 해방감을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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