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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Nov 02. 2021

좋았다, 재미있었다,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 재미있는 시화전을 열어주세요

학교를 옮길 때부터 큰 짐이었다. 신안의 이 작은 학교는 '시'를 노력 중점으로 삼고 있는 학교였다. 그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시 교육'을 특별히 추진해오고 있는 학교였다. 해년마다 학생들의 시집을 발간해 오고 있었고 몇 해 전부터인가는 시화전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오고 있었다. 

 그냥 국어선생으로 살면 좋겠는데 '시 쓰기 교육'을 특별히 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다. 나도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학교 예산을 들여가면서 행사를 연다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니 해볼 만하지 않겠나'

'요즘 같은 세상에 시를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 일 아닌가'

'아이들이 재미없어하겠지만 그래도 시를 써봤다는 게 추억이 되지 않을까'

'잘 하든 못하든 해보는 거지 뭐'

'내가 시를 쓰려고 끙끙대는 것과 시 행사를 끙끙대며 하는 것이 결국 같은 일 일거야'


 학교 예산은 무려 천만 원이 세워져 있었다. 일 년에 천만 원을 아이들의 시 쓰기 교육으로 집행해야 한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천만 원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평생 칠판 앞에서 아이들만 가르쳐온 선생이 천만 원 예산을 쓴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작년에는 시인을 초빙하여 강사비로 몇 백만 원을 썼다고 들었지만, 나는 '내가 시 쓰는 사람인데'라는 개똥 자부심이 있어서 그렇게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강사는 한두 시간 강의하고 가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일 년 내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므로 아이들의 속내를 더 잘 알 수 있고, 아이들과 더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1년의 계획을 대략 세우고 학기초부터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불러내어 야외 시 쓰기부터 시켰다. 시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 다른 학생들이 지은 시집도 읽히고 좋은 시도 옮겨 쓰게 했다. 윤동주의 '서시'와 김춘수의 '꽃'과 같이 중학생이면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를 외우게도 했다. 



 아이들은 시를 싫어한다. 시를 쓰라고 하면 지루하고 심심하고 귀찮은 표정부터 짓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고민한다. '뭘 가지고 시를 쓰지?'. 시를 쓸 게 없다는 것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학교의 학생이면 당연히 시를 일 년에 몇 편씩은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개인적인 반항은 하지 않지만,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는 꼴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킬 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하니까 말이 당당하게 나오지 않는다. 미안해서 당당하지 못한 마음을 감추고, 어떻게 하면 시가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A4 백지를 나누어주고 한 시간 안에 채우라고 한다. 중학생 정도이면 시를 한 시간 안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곳 아이들은 한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 한 편을 쓰는데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를 예상한 건 내가 너무 아이들을 몰라서였다. 

 아이들은 몇 분 머리를 쥐어박고, 몇 번 고개를 까닥거리고, 백지를 몇 번 내려다보고 그러다가는 단박에 써 내려간다. 한 십 분이면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다했다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 선생님, 다 했어요, 이거 시 맞지요?"

"선생님, 저 잘 썼지요?"

 아이들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몇 번 생각하다 그냥 생각나는 것을 쓴다. 물론 극소수의 아이들, 한두 명은 나의 기대대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미처 쓰지 못하곤 하지만, 교실 분위기는 이미 시의 감수성에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다. 


 1학기가 끝나니, 아이들 공책에는 세 편의 시가 써졌고 아이들은 한 편의 명시를 외울 수 있게 되었다. 2학기가 되고 가을이 될 즈음, 시화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작년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나의 개성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편하게 마음을 먹으니 부담이 좀 줄어들기도 했다. 


시화전 행사로 꼬박 하루를 잡았다. 오전에는 컵에 자작시를 새기기, 오후에는 그동안 만들었던 시 영상을 발표하고 중간중간에 악기 연주와 노래도 겸하기로 했다. 오로지 혼자 기획하고 혼자 실행했다. 사회자를 정해서 연습시키고, 컵 만드는 업체와 상의하고, 아이들 시를 족자로 만들어서 강당 벽에 붙이고, 현수막도 내걸고 입간판도 세웠다. 끝나면 아이들이 배고플까봐 가래떡과 음료수도 준비했다.  이곳 신안에는 떡방앗간이 없어서 근처 무안읍에서 떡을 가지고 오는 수고까지 했다. 행여 할 일을 잊을세라 메모장에 빽빽이 해야 할 일을 쓰고 지워가면서 준비했다. 하나라도 빈틈이 있으면 안 되니까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일이 필요했다. 행여 방송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강당의 컴퓨터 상태, 마이크 상태, 빔 프로젝트 상태까지 일일이 점검했다. 누구 하나 잘 되어가냐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중순, 강당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명칭은 '시와 음악이 있는 가을'이었다. 교실에서 책상과 의자를 강당까지 옮겨와 띄어 앉도록 했다. 전교생이 60명도 안되는지라 띄어 앉기가 가능했다. 내심 책상이 강당에 그렇게 가득 차면 옛날 과거시험 보는 고사장 같을 거라는, 그래서 그 자체가 대단한 광경이 될 거라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하얀 컵에 시를 새기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시를 새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서 많은 글자를 넣을 수가 없었다. 먹지에 본을 뜨고 그 윤곽을 따라 가느다란 펜으로 물감을 묻혀 나가는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한 시간도 못 되어서 지치기 시작했고, 한편 눈치껏 짧게 새겨버린 아이들은 남는 시간 동안 빈둥대고 있었다. 글자가 마르게 하려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하니 아이들이 컵을 온전히 잘 보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컵 만들기를 그다지 흥미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밥을 먹고 다시 강당으로 모였다. 60명이 안 되는 숫자이지만 모여드니 꽤 많아 보였다. 학년별로 무대 위에 올라가 외웠던 시를 낭송하는 순서이다. 아이들은 앞에 서지 않으려고 쭈볏대었고, 뒤에 물러선 아이들은 그 아이대로 더 뒤로 숨으려고 애를 썼다. 한번 연습시키기는 했지만 너무 부끄러워하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낭송 소리는 작았다. 마이크 시설이 있어서 포토에세이 발표나 준비한 시영상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중간에 있었던 악기 연주였다. 해금과 전자 피아노와 보컬이 어우러져하는 '아리랑'연주는 삑삑 대기만 할 뿐 소리가 이어지질 못해 몇 번을 다시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응원 박수를 받아야 했다. 야유가 안 나온 게 다행이었다. 바이올인 연주도 형편없었다. 음악학원 하나 없는 섬 마을에서 바이올린을 그 정도라도 배워서 연주하는 게 기특했지만, 무대에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지적 장애가 있는 남자아이 한 명이 빤짝이 옷을 입고 빤짝이 모자를 흔들어대면서 마음껏 불렀던 노래였다. 


 출구에서 나가는 학생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면서 그래도 행사가 무리 없이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런 온종일 행사를 혼자 힘으로 치러낸 것을 스스로 기특해 했다. 후련했다. 한 해 절반의 부담을 덜어낸 기분이었다. 나가는 아이들에게 어땠어? 재미있었어?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뭔가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그냥 후련한 기분을 혼자 느끼는 것으로 그날 하루는 만족하고 싶었다. 

                                                            

                                                - 전시되었었던 학생시-


다음날 설문조사를 했다. 몇 개의 문항을 만들고 학급에 들어가서 전체가 하도록 했다. 내가 설문조사를 한 목적은 다음 해 행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이들로부터 '좋았다, 재미있었다, 잘했다'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비록 음악은 엉망이었지만 시 부분은 좋았다고, 음악 때문에 시 부분이 망친 거 같아서 서운했다고... 뭐 그런 말을 확인받고 싶은 꿍꿍이가 있었다. 


 그러나 설문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물론 음악이 엉망이어서 연습이 꽤 많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대부분이었고 그에 비해 시 발표가 괜찮았다고 응답한 경우가 많았지만, 드문드문 그 반대의 답도 있었다. 내가 엉망이라고 여겼던 연주를 어떤 아이는 '연주가 끊어졌을 때 음악 선생님이 뛰어올라와서 같이 박자를 맞춰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라고 답한 아이도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이었던 것은 " 재미가 없었다"였다. 

 나는 형식에 맞추어서 조용한 분위기와 집중의 효과를 얻었다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재미를 찾고 있었다. 특히 "작년보다는 재미가 적었다"는 말에서 나는 무엇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 '작년보다 재미가 없었다고? 작년에는 어떻게 했는데?? 시에서 어떻게 재미를 찾을 수 있지? '라는 물음들이 항의하듯, 변명하듯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당장 사회를 보았던 똘똘한 여학생을 불러서 작년에 했던 시화전의 내용을 꼼꼼히 물어보았다. 이제야 작년의 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작년에 시화전을 주도했던 선생은 막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신규발령을 받은 초짜 교사라 알고 있었다. 어리지만 굉장히 아무지게 일을 잘했다고 선생들이 평할 때마다 터무니없는 질투심이 일어나곤 했었다. 그래서 아마 행사 전에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나처럼 나이를 엄청 먹은 사람이, 경험이 쌓이고도 남을 사람이 경력 2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했냐고 방법을 묻는다는 것이. 


 아이들은 신나게 작년의 일을 말해주었다. 마치 답을 알고 있는 아이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나는 알았다고, 내년에는 좀 바꿔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져버린 기분이다. 잘했다고 여겼던 것이 '잘하지 못했음'으로 밝혀지면서 명백히 드러난 참패였다.  재미에 대한 참패이다. 아이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재미가 없음으로 인해서 아예 아이들 근처까지 가지 못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 할 '흥미 유발'이 빠진 격이다. 

 졌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것, 나이!  젊디나 젊은 선생에게 져버린 느낌이다. 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감정일지라도 내 마음이 지금 그렇다. 나이가 많으면 반드시 어린 사람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으로부터의 참패이다. 


  물론 이번 시화전에서 배운 것도 느낀 것도 있었으리라. 나는 지금 재미에 눈이 멀어서 내가 치른 행사를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도 분명 있었으리라. 처음의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가 본다.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시로 하루 행사를 한 것은 대단한 일 아닌가?'

 ' 그래도 아이들이 꼬박 두 시간을 앉아서 잘 들어주지 않았나?'

 ' 들었으니, 무언가 아이들 가슴에 남아 있는 게 있겠지?'

 ' 재미는 조금 덜 했을지 몰라도 감동은 분명 있었을 거야'

 ' 나의 개성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만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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