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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Jul 10. 2024

농부 달력

나는 그림책으로 해방 중입니다.

“집에 먹을 건 있어? 봄나물이랑 쑥개떡 챙겨가서 먹어.”

“부럼은 깼니? 오늘 오곡밥 먹는 날인데.”

“요즘 송홧가루 날려서 마당 지저분하다. 너희는 괜찮니?”

“며칠 뒤에 초복인데 둘이서 삼계탕 사 먹어.”

“지금 나오는 양파가 제일 단단할 때야. 사다 놨으니 가져가 먹어.”

“네가 좋아하는 생대추 나온다. 철 지나면 못 먹으니까 사다 먹어.”

“일기예보에도 비 오는 걸로 되어 있는데 구름을 보니 내일 비 많이 오겠다. 우산 챙겨가.”

“팥죽 안 먹었지? 오늘 해가 제일 짧은 날이잖아. 올해도 거의 다 갔어.”


부모님과의 통화는 언제나 밥은 잘 먹고 있어?라고 시작해서 

계절에 따른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기라는 말로 끝난다.

밥과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은 늘 같아서 알겠다고 하지만 

가끔 계절의 날씨나 제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궁금해진다.

아빠와 엄마는 언제부터 계절을 잘 알았을까? 

나는 밥 한 끼 챙기는 것도 귀찮은데 어떻게 매번 잊지 않고 계절을 잘 챙기는 걸까.

한 번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그걸 어떻게 잘 알아?" 

“우리 세대는 그게 익숙하니까.”


어렸을 적부터 계절과 함께 자라서 익숙하다는 말. 답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계절마다 산이나 들에 피는 나물과 꽃이 무엇이며, 제철마다 나오는 음식은 무엇이고, 

눈이나 비가 많이 오면 농사가 어떻게 바뀌는지.

이 모든 게 부모님의 계절 안에 들어있나 보다. 

왠지 부모님의 계절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다채로운 것 같아 조금 부럽기도 하다.

그럼 나의 계절은 무엇일까?


나의 계절은 달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1월과 2월 사이에 있는 설날이 지나가면 추운 겨울이 끝난다.

3월에 벚꽃이 피고 지면 짧은 봄날의 4월이 오고, 행사가 많은 5월을 정신없이 보낸다. 

그리고 6월인 여름을 맞이한다.

장마철이 끝나면 7월, 8월의 휴가철이 시작되고, 가을이 다가온다. 

9월과 10월에 추석이 끝나고 한숨 돌릴 때쯤 11월에 단풍을 구경하며 첫눈을 기다린다.

12월에는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연말을 보내고 한 해를 마무리한다.

가끔은 달력에 표시된 날짜로 이번 달에 있는 일정을 확인하며 날짜와 계절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제철 음식은 그나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몇 가지 과일과 채소를 빼고는 부모님이 알려주거나, 

마트에 진열된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참 단순하다. 아니 단순해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느끼는 계절의 기준이 바뀌고 있는 걸까?

환경과 삶의 변화로 자연을 가까이에서 느끼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 계절 감각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계절이 점점 잊히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나의 계절에 대해 잘 말해줄 수 있을까?


<농부 달력>이라는 그림책은 잃어버린 나의 계절을 적어 놓은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에 가면 느끼는 계절마다 다른 풍경, 

자연과 함께 계절을 맞이하는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 나는 날짜로 계절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3월은 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있었다.

시골에 가면 논과 밭의 모습이, 그 사이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계절마다 달랐다. 

꼭 시골로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뒷산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면 봄이 오는 신호였다. 

여름이 되면 자연스레 집에 미숫가루가 있었고, 아이들은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가을에는 길거리에 은행 냄새가 가득했으며 집집마다 김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많이 쌓인 눈에 신이 나서 포대자루로 눈썰매를 타러 나갔고, 

가끔 밤에 “찹쌀떡” 하고 외치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계절을 맞이했다.

이 그림책이 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나의 추억 속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다시 한번 핸드폰과 책상에 있는 달력이 아닌 이 <농부 달력>을 보고 계절을 맞이하고픈 마음이 든다.



겨울을 겨울답게 난다는 것

봄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을까요

흙 속의 벌레가 깨어나고 구름은 빠르게 흐릅니다

잠자리가 낮게 날면 비가 내립니다

살랑 부는 바람에 가을이 여뭅니다

벌레들도 땅속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남은 벼를 쫍니다


김선진, <농부 달력>


<농부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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