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관람을 놓친 상황에서 이것마저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관람한 오늘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감독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이자 그의 유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왠지 누군가의 길고도 긴 인생을 함께 체험한 듯한 기분을 들게 해 준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의 결혼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사업이 큰 위기를 맞이한 가장 NJ와 단조로운 일상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아내 민민,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여고생 팅팅과 8살 소년 양양까지. NJ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나간다. 많은 장면에서 그들을 동일시하기보다는 관찰자 입장에서 그려내는 카메라 연출을 따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 또한 그들 각자의 삶을 담담한 태도로 지켜보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감정의 변화 때문이든, 맞이하는 외부 상황의 변화 때문이든 평범하던 일상에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어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 혹은 환상을 품게 만드는 사건과 마주한다. 예컨대 NJ는 우연히 30년 전 짝사랑 셰리를 만나 도쿄 출장에도 그녀와 동행하게 되고, 팅팅은 자신의 옆 집에 사는 리리의 남자 친구였던 패티에게 점점 호감을 느끼게 되며, 민민은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절로 떠난다.
그러나 어쩌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를 그들의 변화는 결국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다시 하나의 과거에 머물게 된다. 오히려 차마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터놓을 수 없는 괴롭고 고된 기억만을 남길뿐. NJ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들이 겪은 새로운 경험도 다시 하나의 추억으로 묻어둔 채 이전과 똑같은, 어쩌면 너무 단조로워 지루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삶을 다시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스토리가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영화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의 변화, 그리고 다시 삶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것과 너무나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를 봤다'라는 느낌보다는 '누군가의 삶을 체험한 것 같다'는 인상을 안겨주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즐거운 일만 가득할 것처럼 한없이 달콤하지만, 결국 그 달콤함 끝엔 다시 한없이 쓰리고 비린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정확히는 삶이란 것이 그런 것임을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자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듯한 이 영화는 관람하는 내내 자연스럽게 나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존재로 그리고자 한 인물은 다름 아닌 8살 소년 양양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 양양은 삼촌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주면서 '삼촌은 뒷모습을 못 보니까 찍어줬어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에드워드 양이라는 감독이, 아니 어쩌면 현존하는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찍는 이유와도 다를 것 없어 보인다.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 인생의 세 배를 살게 된다는 패티의 말처럼, 감독들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살아가며 미처 마주하기 어려운 세계를 선물하고 관객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면서 세상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그동안 늘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것이 좋아서 영화를 본다'라고 대답했던 만큼 영화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와 자세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작품이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173분이라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마냥 가볍게 즐기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감독이 왜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한 대답이 묻어있는 이 작품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종종 꺼내보고 싶을 정도로 묵직한 여운을 던져준다. 결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결국 하나의 인생이란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와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