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겪은 이들을 향한 소소한 위로.
19.04.04. @CGV압구정
지난 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람했을 당시 생각보다 큰 재미와 여운을 선사했던 박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한강에게>를 약 네 달만에 다시 관람하였다.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진행하는 시네마톡 행사로 다시 만난 이 영화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진하고 먹먹한 뒷맛을, 그리고 아마 다시 만나면 그때는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란 확신을 안겨 주었다.
영화는 첫 시집 출간을 앞둔 진아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온전히 자신의 시로 채워진 시집을 내게 된 만큼 설레고 즐거워야 할 진아는 오랜 연인 길우가 혼수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불쑥불쑥 찾아오는 우울함에 괴로워 한다. 주변의 괜찮냐는 물음이 더더욱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상황에서 영화는 진아의 지금과 길우가 함께 했던 과거를 번갈아가며 그려내면서 진아라는 인물의 삶에 주목하게 만든다.
음악의 활용도 최대한 배제한 채 러닝타임 내내 몹시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만큼 자칫 지루한 관람이 될 수도 있을 이 영화는 89분의 러닝타임 내내 깊이 있는 몰입감을 이끌어낸다. 이 몰입감은 어떠란 이유 때문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는 상실을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을 진아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괴롭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 하고 애써 마음을 추스리는 진아의 모습은 영화 전반에 깔린 공허함의 분위기 속에서 무척 먹먹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소재는 '시'이다. 시인이 직업인 주인공 진아가 시를 가르치고 다른 시인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하는 이 영화에서 시라는 소재는 작품 전반에 깔리는 처연함과 고독함의 정서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 산문이 아닌 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리듬과 운율을 전개 과정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시를 소재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이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서정시를 읽어나가는 것 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 왜 오래된 연인 길우의 병문안을 꺼리냐는 친구 기윤의 물음에 진아는 길우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진아는 어쩌면 자신이 길우를 다치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함께 자신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길우라는 무게를 원망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 나름대로 길우의 빈 자리를 채워가고자 하지만 그럴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진아의 모습은 이를 한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한편, 어떠한 상실을 경험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녀를 공감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훌륭하다는 것인데, 사실 상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데다 각각의 장면에서 억눌러야 하는 감정의 깊이가 상당한 인물을 연기한 강진아 배우는 캐릭터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따라가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더불어 조금은 무미건조해보이면서도 인물에 그만의 색깔을 더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강길우 배우 또한 강진아 배우와 인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며, 그 외에도 그 둘의 관계에 개입하는 인물을 연기한 한기윤 배우와 영화에 활력을 톡톡히 더해주는 전고운, 이요섭 감독의 연기 역시 굉장히 매력적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각자 어떠한 이유, 어떠한 모습으로든 상실을 겪으며 그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할 것처럼 힘든 시련이 찾아와도 어떻게든 각자의 방식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간다. 이렇게 누구나가 공감할 상실의 감정을 담담하고 사려깊게, 무게감 있고 자연스럽게 풀어낸 이 영화가 남기는 미더과 여운은 앞으로도 쉬이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세탁기의 빨래 소리에도, 아무렇지 않게 보아온 강의 물결에도 집중하게 만들고 그 속에 리듬을 찾아낸 박근영이라는 감독이 과연 이후 어떤 작품으로 다시 마음을 흔들어놓을지 무척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