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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트인바다 Sep 27. 2020

패션이몽(異夢) : 그 남자의 대화법

'아'다르고 '어'다른 우리 말, 순탄한 결혼생활을 이끄는 스킬

 

갑자기 선선해진 아침 공기에 가볍게 걸칠 옷을 찾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피식 웃음이 났다. 바로 약 3~4년 전 충동적으로 구매하고 몇 번 입어보지 못한 카디건이었다. '이 옷이 아직도 있었네~' 속으로 생각하며 쓱 집어 들었다가 연애시절의 남편 J군이 떠올라 다시 웃음이 났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14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다. 어쩌면 패션이란 것도 그런 것일까? 비록 외모는 다르겠지만 주인공 앤 해서웨이의 극 초반 모습은 패알못 '나'와 흡사하다. 대학생 때는 후줄근한 회색 후드티를 교복처럼 입고 다녔고, 회사원이 되어서도 출근할 때면 그 날 손에 잡히는 가방, 그 날 발에 걸리는 신발을 신고 나갔다.



그 파란 스웨터는 그냥 블루가 아니야,
세루리안 블루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주인공 앤 해서웨이>

 

 어쩌면 그 카디건을 입고 나갔을 때, 남편 J군은 영화 속 악명 높은 편집장 미란다처럼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그는 평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또 본인의 직업에 걸맞게 옷을 매우 사랑하고, 타인의 패션에도 관심이 지대한 편이다. 내 눈에는 같은 컬러, 같은 디자인의 옷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그의 옷장을 보며 가끔 우리의 결혼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우리의 연애가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해답을 그의 유쾌한 표현 방식에서 발견했다.


오늘 사랑이 가득하네?


 연애 초기, 알록달록한 하트무늬 카디건을 입고 나온 내게 던진 그의 첫마디였다. 아마도 형형색색의 그 옷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 그의 말이 긍정이나 칭찬의 표현이 아닌 놀라움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 것 같다. 결혼 후 나의 옷장 정리를 하며 남편 J군은  '이 옷들이 너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어', '이 옷을 이제 그만 놓아줘.', '얘(옷)는 아주 못된 친구구만'이라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장난을 치며 그 옷을 포함한 여러 옷들을 버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허허 웃으며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는 재주는 살면서 부딪힐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을 웃음으로 넘기게 해 준다. 물론 상대방 역시 그 말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다정한 어투와 표정, 그리고 배려심 있는 단어 선택은 부드러운 대화를 이끄는 좋은 스킬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평소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주 하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얼굴이 두 배가 되었을 때나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을 때 서로 핀잔 대신에 그렇게 말한다. 때로는 다짐 같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략된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역시 사랑한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고 든든해진다. 또 긍정의 말은 세뇌의 힘이 있어서 뒤돌아서면 우리의 대화가 유쾌했다는 느낌만 남게 된다.


 여전히 내 옷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랑이 가득한 카디건'을 꺼냈다 다시 집어넣으며 생각해본다. 순탄한 결혼생활의 핵심은 부딪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딪혔을 때 잘 풀어내는 서로의 대화법에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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