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d Sep 15. 2020

할 것: 더 작은 가방으로 짐을 옮기듯

어제보다 잘 쓰는 법_15일 차

얼마 전 재질이 얇고 작은 백팩으로 가방을 바꿨다. 원래 브리프케이스에 있던 짐을 새 가방에 옮겨 담으려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름대로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녔을 줄이야. 별수 없이 30분 가까이 '필수품 월드컵'을 했다. 소요 시간으로 따지면 이상형 월드컵을 했을 때보다 60배는 더 고민한 셈이다.


월간 잡지와 가끔 보는 파일 뭉치 중 전자를 택했고, 파이썬 책과 킨들 중 후자를 택했으며, 업무상 읽는 책과 재미로 읽는 책 중 전자를 택했다. 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빠진 물건은 세 개다. 도시락통은 먹고 살아야 하기에 뺄 수 없었고, USB와 이어폰은 작기 때문에 작은 주머니에도 얼마든지 들어갔다. 정리를 마치니 짐뿐 아니라 일상이 훨씬 홀가분해진 기분이다.


돌아보면 초고를 쓴 후 글을 다듬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주로 2단계에 걸쳐 윤문을 한다.


1단계에서는 지면(또는 흰 창)이 '가방'이고, 문장이 '짐'이다. 방법은 이미 필수품 월드컵을 통해 설명했다. 죽 읽으며 없어도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문장을 버리는 것. 이때마다 자신과 대화하듯 이렇게 자문하면 잠깐 결정력이 높아진다. "이 짐(문장)이 정말 필요해?"


2단계에서는 문장이 '가방'이고, 단어가 '짐'이다. 문장을 짧게 쓰라는 조언,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그러나 이 지침에 매몰되면 글에 생각을 오롯이 담는 데 방해를 받기도 한다. 바로 내가 그랬다. "문장의 의미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교열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제야 '무조건 짧게 쓰는 버릇'을 고치기 시작했다. 필요한 단어를 담지 못한 채 짧기만 한 문장은 그자체로 1단계에서 덜어낼 짐이 되고 만다.


2단계에서도 이 자문은 유효하다. " (단어) 정말 필요해?" 다만 1단계에서 몸에 익은 버리기에 과몰입해 역시 글의 흐름을 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긴 짐이 내가 진짜 필요로 했던 것, 즉 쓰고 싶은 말이다. 나의 일일 연재가 한결 단출해진 출근길을 닮았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말 것: 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자주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