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교육 열여덟 번째 이야기
얼마 전 뒤늦게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 했다. 꼭 보고 싶었던 드라마 중 하나였는데 주변의 추천에 아이들 방학 기간임에도 첫 편을 클릭하고야 말았고, 결국 며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며 드라마에 푹 빠져지냈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16편까지 보고 나서는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이 드라마를 봤던 많은 사람들처럼. 드라마 홈페이지에 소개된 한 줄,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아저씨 삼 형제와 거칠게 살아온 한 여성이 서로를 통해 삶을 치유하게 되는 이야기'는 우리 일상과 어쩌면 비슷하다. 자세히 보면 등장인물은 주변에서 흔한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는 삶의 무게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고 있고, 사람을 통해 상처 받기도 하지만 또 사람을 통해 치유받는다. 박동훈처럼 어른 같은 어른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고,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인연을 맺는다는 건 더 큰 복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좋은 어른이란 뭘까'하는 질문이 수시로 떠올랐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인생 고민도 덤으로. 그렇게 나에게 숙제도 안겨주었지만 조금은 용기도 생겼다.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엄마이자 어른이 되고 싶었다. 먼저 다가가서 명랑하게 인사해주고 재잘재잘 이야기도 잘 나누는 편안하고 다정한 어른.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속내를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 성격은 아이들 엄마가 되어도, 마흔의 아줌마가 되어도 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과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지쳐있을 때가 많았고, 육아와 나로 살기 그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며 마음은 더 삭막해지는 것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부족해도, 삶에 지쳐 있어도,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더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 좋은 어른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해라.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나의 아저씨 중>
아이들 주변에 좋은 어른이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 존재가 엄마나 아빠, 부모라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보호자나 선생님, 이웃 중 한 명이라도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해준다면 엄청난 힘이 될 텐데. 이렇게 말하는 나 조차도 늘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만 했지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표현을 아이들에게 많이 하지 못했다.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눈빛으로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뭐하시고?”
“아저씨 아버지는 뭐하세요?”
난 아저씨 아버지 뭐하시는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왜 우리 아버지가 궁금할까.
<나의 아저씨 중>
와닿았던 대사 중에 하나인데 유명한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요즘은 생활기록부 등에 옛날처럼 부모 직업란을 적는 양식도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부모님 직업과 어디에 사는지가 아이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어른부터 직업과 학력, 거주지 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누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아이들은 그걸 그대로 보고 자랄 수도 있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다시 꺼내보았다.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수정할 수도 지어낼 수도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을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어린이라는 세계, p253>
어린이들에게 가장 큰 세계는 어쩌면 '어른'이다. 가장 큰 세계인 어른의 존재와 늘 함께하며 어른의 말을 듣고 어른의 행동을 보며 아이들은 자란다. 어떤 어른이 돼야 할까 하는 고민은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 어른들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일지 모른다. <나의 아저씨>를 보며 꾹꾹 적어둔 대사에서 좋은 어른이 되는 길을 더듬어 가본다. "너희 잘 되는 게 엄마의 꿈이고 삶의 낙이다"라는 말 대신 "엄마가 원하는 길 즐겁게 가면서 늘 너희를 응원할게" 말할 수 있는 엄마이고 싶다. 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른이 아니라 '내력을 갖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소신 있게 따르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이들이 겪을 많은 실패와 좌절 앞에서 "괜찮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말하며 일으켜주는 어른이 되길 소망한다.
지석이한테 절대 강요하지 않을 인생, 너한텐 왜 강요해?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희생이라는 단어는 집어치우고.
누가 희생을 원해? 어떤 자식이, 어떤 부가? 누가 누구한테…
<나의 아저씨 중>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나의 아저씨 중>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냐.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아저씨 중>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육아를 하는 분들이라면 마음속에 늘 담고 있는, 때로는 심각하게 툭 터져 나오는 질문 같습니다. 8살, 6살 남매를 키우고 있는 저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어렵기만 합니다.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교육에 대한 제 소신을 조심스레 밝힐 때면 "아이들이 어릴 땐 나도 그랬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며 '진짜 교육 현장'에 한 발짝 발을 딛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만, 아이들과 내 소신을 믿는 마음으로 걱정을 덜어 내어 봅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교육에 '소소 교육'이라는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소소하다'는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뜻도 있지만, 밝고 환하다는 뜻도 갖고 있어요.
그렇게 소신을 갖고, 작은 움직임으로, 아이와 밝고 환하게 교육 제도의 긴 터널을 지나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