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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After Working Holiday

: 캐나다에서 남겨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by 낙타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난다. 도망치듯 워킹 홀리데이를 가도 되냐는 어떤 이의 질문에 달렸던 누군가의 댓글이었나 그랬는데, ‘그렇게 계획하시면 이도저도 아닌 워킹홀리데이가 될 거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워킹홀리데이가 될 거다’라고 했던 것 같다.


도망치듯 워킹홀리데이를 온 당사자로서 나도 요즘 들어 그 댓글을 종종 생각한다. 아니, 요즘 들어서가 아니라 캐나다에 온 순간부터 계속 생각했다. 캐나다에 오긴 왔는데 생각보다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한국에는 빨리 돌아가고 싶고, 괜히 돈 들고 와서 여기서 쓰기만 하고, 애인은 보고 싶고, 언어는 안 통하고.


그런 내가 캐나다에서 대체 남겨갈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내가 돈이랑 시간 써가면서 캐나다에서 남겨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한국에서 인기라는 아크테릭스? J가 론칭하는 브랜드의 옷? 한국에서는 못 구하는 뉴발란스 신발? 한국에서는 못 구하는 캐내디언 위스키? 일단 ZARA에서 산 옷은 좀 남겨간다, 지난겨울 시즌 세일에 옷을 너무 많이 사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캐나다에서 딱히 남겨갈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다. 아크테릭스라고 해봐야 캐나다가 아주 조금 더 싼 정도이고, J가 론칭하는 브랜드의 옷도 사실 특별한 점이 있는 건 아니고, 뉴발란스 신발은 한국에서도 살 수 있고 말이다. 캐내디언 위스키는 좀 다를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하지만 위스키를 사간다 해도 면세 제한 때문에 고작 2병밖에 못 가져가는데, 뭐.


혹자는 낯선 땅에서의 경험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매일 똑같은 가게에 출근해서, 매일 똑같은 대사를 읊으며, 매일 똑같은 음식을 팔다 보면 대체 그 경험이라는 게 얼마나 값진 것일지 의문이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다수자였던 내가 캐나다에 와서 아시안이라는 사회적 소수자로 사는 경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값진 것인가.


뭐라도 남겨 가야 될 것 같은데, 뭘 남겨 갈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뭐가 남을지는 내가 캐나다를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것일까.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건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내게 호의적인 것과 익숙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매일 반복되는 삶의 기간을 일정정도 버텨내는 경험. 그 인내의 경험이야말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느껴져서, 그걸 얻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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