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기의 색, 빨간 문과 빨간 눈

'어린 나'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by 해나HJ


나의 유년기.

나의 유년기의 색은 빨간색이다.


신기한 것은 그간 내 안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치유하고자 노력했던 지난 10여 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10년 전의 나라면, 아니 불과 몇 년 전의 나라면 그 시절 '빨간 문'과 '빨간 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저항감에 힘들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래도 그 기억에 들어가는 일이 조금은 편해짐을 느낀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3학년 정도의 시간까지 지냈던 그 집, 빨간색 철문으로 되어 있는 그 집.

그 집을 나는 빨간 문 집이라고 내 안에서 부른다.



'빨간 문 집'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집이 있는 동네로 작년 말쯤, 30년여 만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빨간 문 집과 불과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어느새 43살이 되어버린 지금의 내가 살고 있다.



무슨 무의식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일까.


이사 오기 전에 여러 집들을 보러 다니다 이 동네에 지금 살고 있는 빌라의 전셋집을 보게 되었고, 하필이면 보았던 집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계약하게 되었을 뿐인데, 그때에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다니...' 하며 30년이 지나 다시 이어진 인연에 신기해했었다. 이 동네가 그 빨간 대문 집이 있었던 곳인 줄 모르고 계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무의식적인 결정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동네에 내가 30년 만에 다시 오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빨간 대문 집에 갇혀있는 나를 40대가 되어버린 내가 찾아주기를,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나서 나 아직 이렇게 잘 살아있으니, 잘 버텼고, 그 힘들었던 시공간에서 벗어나있는 나를 봐달라고, 그래서 그곳에서 나와도 된다고, 어린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을 한다.



나를 되찾기 위해 나는 이곳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 나의 내면의 공포의 상징, '빨간 문과 빨간 눈'



그 집, 빨간 대문집은 나에게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하루, 이틀을 건너 멀다 하고 어머니와 다투고, 폭력을 쓰던 아버지. 그것은 단지 부부 사이의 일상적 다툼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힘이 센 자가 약한 자에게 자신의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을 무의식적으로 풀어대는 약자에 대한 엄청난 학대이자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어린 나는 그 순간들을 '공포', '두려움'이란 감정과 함께 기억하지 못했다. 무의식 속 이 때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 건 30대 초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마음을 들여다본 그 시기부터였다. 분명 무서웠고, 아버지의 폭언과 어머니의 비명이 들릴 때면 옆방에서 상상도 못 할 두려움을 느끼며 그 순간순간들을 지나갔지만, 7살, 8살의 나는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서 '무서워', '두려워'라며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다.


방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어쩌면 아빠가 엄마에서 그치지 않고 나도 때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감, 때로는 방 너머로 들리는 가슴 아픈 소리들로 추측하며 지금 엄마에게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지 모르는 생각들에 정신은 마비되어 있었다.





#. 빨간 눈


큰 방에서 어머니와 다투던 아버지가 내가 있던 옆방으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눈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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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였다.

분노.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아니,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분노에 휩싸인 눈.

광기 어린 빨간 눈.


그런 눈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큰 방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차라리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빨간 눈과 마주치던 나는 본능적으로 어머니가 걱정되었고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여기까지이다.


그 빨간 눈을 보던 그 순간 이후의 기억은 거의 없다. 문을 박차고 열어 옆방으로 나오던 아버지의 눈빛만이 선명하게 기억날 뿐이다. 기억에는 없지만 분명.. 다른 싸운 날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얼굴이 부어오르도록 울었을 것이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얼굴의 멍도 조금씩 있었을 것이고..





나는 아직도 나의 유년기 속 그 빨간 문 집에 있다. 어린 나의 몇몇 조각난 마음이 아직 그곳에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몸에 각인되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무엇이다. 아직도 내 피에 세포속에 그 기억들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내 마음을 치유하려 했던 노력 덕분인지 그전만큼 공포스럽거나 두렵지 않다. 기억을 떠올릴 때면 마음은 아프지만, 이전보단 조금은 덜 아프고, 조금은 덜 울게 된다.


앞으로의 시간 동안 유년기 속 그 집의 빨간색들을 선명하게 떠올려도 그 옆에 지금의 내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내가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끔 나는 그 집에 있는 나를 찾아간다. 마음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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