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결국 서울 변두리에 있는 집을 선택했다.
이전 집과 비교하면 비슷하게 낡은 아파트 단지지만 현관과 베란다 뷰가 뻥 뚫려 있었기에 홀라당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해서 나아진 점은 거주 환경도 좀 더 나아졌다. 바로 앞에 지하철역이 있고 단지도 훨씬 커서 관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동네가 누추한 건 비슷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새로 생긴 신도시가 있고 다른 방향의 옆동네는 재개발한다고 이주까지 마쳐서 텅 비어있었다. 옆 단지도 재개발한다고 하니 보다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민이와 나의 출퇴근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는 게 많이 중요했다. 물론 수서나 경부고속도로 근처 강남에 살았더라면 더 줄였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예산 안에선 여기가 최선이었다.
집에는 세입자가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세입자가 살고 있는 집들은 대부분 매물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으로 정해져 있거나, 매물을 보지 못하고 매수를 했어야 했다. 대부분 이런 것들이 문제고 그저 매물 구경하기 어려운 게 전부 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입자를 탓하는 건 아니라고 먼저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각자의 입장과 사정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가계약 후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구청의 토지거래허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 집은 규제 지역 시세들을 한참 못 따라가는 금액대의 동네지만 물리적인 지리 상 같은 구 이기 때문에 토지거래 허가증이 필요했다. 풍선 효과 받기에도 한참 못 미치는 지역이라 이런 절차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랏일이니 따라야 했다.
토지거래허가 신청은 서류 양식대로 작성해서 구청에 제출하면 된다. (공동명의라면 모든 서류는 두 장씩 작성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작성할 수 없는 서류가 있는데 세입자 퇴거 확인증이었다. 이름 그대로 정해진 날짜에 퇴거하겠다는 세입자가 자필 서명을 한 서류가 필요하다.
가계약 사실이 부동산 통해 전달 됐기 때문에 문제없이 서명이 담긴 서류를 받을 수 있을 줄 알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토지거래허가만 기다리며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난리 났다는 연락을 부동산 사장님께 받았다.
세입자가 권리를 주장했다. 우리가 가계약한 잔금일엔 나갈 수 없고 잔금일(퇴거일)을 몇 주 더 뒤로 미루지 않으면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가서 살 집을 구해야 하니 전세금을 미리 달라고 했다. 중도금을 전세금만큼 냈어야 했다.
민이와 나는 당황했다. 먼저 중도금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금은 어느 정도 준비 되어 있었고, 어차피 내야 할 돈을 미리 주는 거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하지만 잔금일을 늦추는 건 우리에게 손해였다. 살고 있던 집을 이미 매도해서 당장 갈 곳 없는 우리는 늘어날 기간만큼 단기 임대료와 짐 보관 비용으로 최소 백만 원 이상 더 써야 하게 되었다.
토지거래허가는 매수자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든 서명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우리가 맞추겠다고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토지거래 허가를 못 받았을 때의 가계약 파기는 우리 책임이 아니니까 매도자도 같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율했었어야 했다.
잔금 일정을 늦추면 손해가 있으니 그만큼 깎아달라거나 손해를 매도, 매수 양쪽에서 나누자고 협상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험과 지혜 둘 다 갖지 못했었기에 생각하지 못했다.
작은 어려움과 함께 토지거래허가 까지는 받았으나 주택담보대출을 실행시키며 위기가 한 차례 더 있었다. 영끌 대출이 아니었기에 강력한 대출 규제로 고생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출 신청 접수 후 은행 담당자를 통해 대출 관련 설명을 들었고 안내 통화 마지막에 세입자에게 퇴거 확인을 은행 통해 받을 수 있으니 미리 부동산에 알려만 놔달라고 들었다.(토지거래허가 시 받은 건 사용 불가.)
그래서 부동산에 미리 연락을 드려놨다. 세입자 연락처로 내가 직접 연락할 수 없기도 했다.
은행 대출 조사원이 대출 담보 물건인 매수 예정 집을 보러 간다고 한 날, 은행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세입자가 집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협조되지 않아 해서 담보 조사 일정을 못 잡고 있다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대출이 많지 않더라도 은행 대출 없이 이 집을 매수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은행을 찾아 새로 대출 신청하기에도 잔금 날까지 날짜가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이런 절차가 꼭 있어야 하냐고 은행에 빌었고, 민이는 한 번만 협조해 주시면 안 되냐고 세입자에게 빌었다.
다른 은행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담보 대출 확인하는 절차는 꼭 필요하고 세입자와의 분쟁이 생길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진행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은행에 전화해서 물어보니 똑같은 설명이었다.
인터넷 은행은 조금 여유롭지 않을까 싶었지만 대출 규제가 시작되었던 시기 었기에 인터넷 은행은 대출 접수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젠 민이가 설득할 수밖에 없었고, 애원하고 애원해서 세입자에게 겨우 허락받았다. 하지만 당장 다음날 오전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본인이 집에 있지 않을 때 부동산과 동행해서 보는 것도 안 됐다.
어디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대출 조사원께 정말 죄송한데 세입자가 내일 오전만 가능하다고 전화로 말씀드렸다. 하지만 본인도 업무 스케줄이 있어서 안된다고 하는데 자존심 다 버리고(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한 번만 부탁드린다고 불쌍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알겠다고 내일 아침에 방문하겠다고 해주셔서 조사 일정을 잡게 되었고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많이 당황하고 놀랬기도 했고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둘 다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 연차를 쓰고 민이와 함께 아침 일찍 아파트 단지로 갔다.
어차피 업무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고 조사원분께 감사하다고 인사도 드릴 겸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가서 빌기라도 할 마음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계속 기다렸지만 시간이나 동선이 어긋났는지 조사원을 만나 뵙지 못했다.
1초 1분, 5분이 너무 길었다. 초조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민이와 같이 안절부절못하던 중 은행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방문은 했지만 협조가 잘 되지 않아서 실랑이를 했고 조사원이 이미 떠났다고 했다.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대출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다는데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조사원께 전화를 드렸지만 계속 통화가 닿지 않았고 세입자를 찾아가자니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았다.
바사삭 멘털이 무너졌지만 차선을 찾아야 했고, 우선 근처의 같은 은행 지점으로 찾아가서 상담받았다. 상황을 설명드리니 같은 은행이지만 인터넷에서 신청한 대출이기에 여기선 어떻게 할 순 없고, 지점에서 대출 신청하면 그렇게 까진 조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금리는 지금 신청한 상품보다는 높을 거라고 했다. 계산기를 두들겨보니 1년에 몇 백만 원만 손해 보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당장 마음은 편해졌다. 다만 솔직한 마음으론 원망스러우면서도 아무것도 못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기죽은 채 부동산에 앉아 땀을 닦고 부동산 사장님과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조사원분이셨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은행에 서류들 제출했으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은행 대출 담당자와도 다시 통화했는데 전달받은 서류 참고해서 심사해 보겠다. 될지 안될지는 오늘내일 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우선 일하러 출근했고 회사에 도착했는데 배고프고 졸리고 진이 다 빠져서 잠깐 화장실에 앉아있었다. 그때 은행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심사 완료 됐으니 대출 실행일 까지 서류 준비해서 기다리시면 된다고 고생 많으셨다고 했다.
정말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통화를 마친 후 화장실 똥 칸에서 뛰쳐나와 민이에게 바로 전화 걸어서 심사 완료 됐다고 했다. 환호 지르고 싶었는데 애써 작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조사원분께도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문자 드렸고, 고민하다가 민이에게 세입자에게도 도와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문자 보내놓자고 했다.
착한 마음이나 착한 척하려고 한건 아니고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협조해주긴 한 거기도 하니 도리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이기도 하고, 이사 나가기 전까지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세상엔 이해되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다. 특히 사람 사이의 일이 제일 힘들다. 서로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직 너무 약하다.
지긋지긋하고 두렵지만 해결책은 몇 개 없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살거나, 내 능력을 키워 이런 상황들 속에서 내 삶을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방법이다.
세상의 힘인 돈을 많이 벌거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언변이나 풍모를 가지거나, 손해를 견딜 수 있는 자애로운 마음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 중 한 개의 능력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원망하거나 포기를 고민할 시간에 나 스스로가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깊이깊이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