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상만사 감사하자
이사 마지막 편이다. 다양한 일들이 있었던 이 시였지만 해결 과정이나 사건 위주보단 느낀 점 위주로 적으며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아무래도 경험의 흐름이나 정보 전달 보단 과정 속의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본인의 활약을 기록하는 게 좋다는 민이의 피드백이다.
이사 일정이 맞지 않아서 5주 정도 집이 아닌 호텔에서 살았어야 했다. 호텔이라고 해서 좋은 데서 머물렀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비용 이슈로 인해 작은 방 한 칸짜리 비즈니스호텔에서 민이와 둘이 몇 주를 버텨야 했다.
우리 집의 냄새와 아늑함 그리고 침대, 냉장고, 옷장, 세탁기 등등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모든 것들의 부재가 느껴지니 그리워지고 소중해졌다.
물론 민이와 코인세탁기 앞에 앉아 빨래를 기다리며 패드로 넷플릭스를 봤던 추억들도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하고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둘이 게임을 하고 싶어 오랜만에 피시방을 가니 연애 때가 생각나서 좋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편한 옷을 입은 채 맥주 한 캔 씩 책상에 올려두고 각자 손에 익은 마우스와 키보드로 가상의 협곡을 누볐던 날들이 소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서울은 숙박비가 비싸서 가성비 호텔을 찾다 보니 수원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서울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출퇴근은 편했지만 막히는 시간대에는 서울로 퇴근하나, 수원으로 퇴근하나 10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게 평소에 자주 가지도 않던 한강이 괜히 더 그리워졌다.
그래도 언제 또 수원에 살아보겠냐는 생각으로 민이와 수원 화성 등 여기저기를 돌아보려 했는데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 돌아보지 못했다.
군인일 때도 느꼈던 생각과 감정 같은데 금세 잊어버렸다. 장소, 물건, 사람 모든 게 익숙해지면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되지만 다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인생에서 계속 생기는 것 같다.
소중함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이런 일들을 다시 겪거나 느끼고 싶지 않긴 하다.
호텔에서 매일 달력을 보며 집으로 가고 싶은 날만 손꼽고 있는 내게 기다림이 지루하지 말라고 이런저런 일들이 생겼나 보다. 살짝 지쳐 있었다.
토요일에 인테리어 확인하러 머물던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차 앞바퀴가 덜덜 떨렸다. 이건 심하다 싶어서 급하게 이사 갈 동네 근처의 카센터에서 검사를 받고 견적을 받아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나왔다.
최소 30% 이상 바가지는 썼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차에 대해 자신 있게 아는 게 적어서 이것저것 따져보지 못했다.
지난글테 적은 임차인과 대출 문제와 인테리어에 남아있는 에너지가 없기도 했다.
우선 문제의 본질인 자동차 하부가 떨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수리 맡겨놓고 민이와 나는 지하철 타고 수원으로 다시 왔다.
먼 길을 다녀온 패잔병처럼 차에 있던 민이 악기, 악보, 가방들을 잔뜩 둘 다 양손에 이고 수원시청역에 내리니 비도 오기 시작했다.
요즘 계속 멍청하게 손해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래서 우산은 몇천 원이라도 손해 보고 사고 싶지 않았다.
가랑비에 머리가 적당히 젖은 채로 두세 군데를 돌아다니며 나름 합리적으로 우산을 샀다고 만족해하는 민이와 내 모습을 서로 보니 둘 다 동시에 허허 웃음이 나왔다. 허탈하기도 하면서도 이런 것들이 뭐라고 둘이 마음 고생하나 싶기도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내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민이가 좋아하는 대창 덮밥을 먹었다.
잔금도 다 치르고 인테리어도 마쳤다. 호텔살이 마지막 날 캐리어에 짐을 다시 넣는데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다만 또 사람에 대한 실망의 연속이었다. 인테리어, 이사, 입주 청소 모두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걸 티가 나게 느꼈다. 피해 의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물을 보면 쉽게 타협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정해진 비용을 지불하면 정해진 결과물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알아서 잘해주세요'는 세상에 거의 없는걸 여러 차례 느꼈다. 내가 80을 원한다면 100을 요구해야 80에 맞춰서 주는 것 같다.
요구했을 때 듣고 노력해주시는 분들도 있는 반면에 요구 자체를 이런저런 이유나 그럴듯한 거짓말과 함께 애초에 승낙을 안 해주거나 비용을 더 요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도 돌아보면 떳떳하지 않다. 나는 내가 받는 월급 100% 만큼 하고 있나?
물론 진짜 열정적으로 불태울 때도 많지만 잠깐 딴짓하거나 일을 헤매는 등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무튼 마음을 어느 정도 비워놓고 짐이 덜 옮겨졌으면 내가 하고, 청소가 덜 됐으면 우리가 했다.
인테리어는 많이 노력해 주셨지만 사소하건 그냥 우리가 했다. 실리콘이 덜 발려 있거나 마감이 덜 되어 있으면 민이가 했다.
그래도 많이 즐거웠다. 냄새나 느낌이 아직 예전 집처럼 보금자리 같진 않지만 다시 우리 집이 생겼고 조금이라도 거주하는 환경이 쾌적해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집 근처 신도시도 마실 가고, 어디에도 많은 공원, 지척인 쇼핑몰들, 가까운 지하철역을 즐기며 둘 다 신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혼 때에도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다며 들뜬 마음으로 집 바로 뒤 산과 공원을 즐기겠다고 매일 산책하고, 문화센터와 헬스장을 누리고, 걸어서 시장과 지하철역을 갈 수 있음에 만족해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감사한 것도 또 언젠간 까먹으려나 싶은 마음에 아직 개구리도 아니고 올챙이 적 잊지 말자고 찬물 섞인 잔소리를 내 스스로와 덩달아 민이에게 해버렸다.
올해 가장 큰 숙제였던 이사를 마쳤다. 100%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목표를 향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험을 같이 하며 성장했고 민이는 특히 인테리어 지식을 엄청 많이 얻었다.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성장이 필요하지만 인격적으로도 성장이 아직 많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역시 인생은 실전이다. 다만 경험에 스스로가 너무 매몰되거나 내 기억만을 너무 맹신하는 건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