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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박이 Jul 30. 2021

하나와 둘 사이

당신 없이 못 살아

 결혼하고서 질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다 보니 둘 만의 새로운 규칙이 생긴다. 그 규칙은 두 사람을 모두 만족시키는 그런 규칙이 아니라 어찌 보면 서로가 손해를 보는 그런 규칙들이다.  조금씩 자신의 것을 양보해서 만드는 그런 규칙이다.

 삶은 질서정연해지지만 동시에 자유롭지 않고 무언가 불편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애당초 나는 질서 있는 삶과 거리가 멀다. 무계획적으로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고, 어지르는 편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일도 많다. 인생계획을 꼼꼼하게 짜지도 않는다.

 남편은 전날 입을 옷은 항상 미리 고르고, 옷도 깔끔하게 입는다. 신발을 휙휙 벗어놓는 나와 다르게 신발정리도 잘한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질서 정연한 편이다.

 나는 남편이 내 신발을 정리해주는 줄도 몰랐는데. 신발정리를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그를 보고 나서 내가 그런 사람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신발 하나부터 신경 써야 하는 삶이라니. 결혼이란 참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


 싱글일 때는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부모님이 나를 구속할지언정 ‘자유’ 로운 망아지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울타리가 쳐져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울타리가 쳐져 있는지 까먹는, (여전히) 망아지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살면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집에서는 누구 엄마, 누구 아빠가 되어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나이가 들었을 때, 장례식장에서나 불린다는 이름 석자.


 생각해보면 할머니도 엄마를 "혜주 엄마야."라고 불렀고, 아빠도 "박 소장님" 또는 "혜주 아빠!"로 불렸다. 부모님과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겹쳐 보이자, 걱정이 생겼다. 이러다가 정말 장례식장에서야 엄마, 아빠의 이름이 불리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나 때문에 부모님이 이름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니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혜주 엄마, 혜주 아빠가 돼버린 엄마, 아빠.


 부모님도 이름으로 불려졌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때부터였을까.

 그래서 우리 집은 아마도 내가 스무 살이 될 무렵부터 – 학생 때는 왠지,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 엄마와 아빠를 이름과 별명 (도여사, 도마미) (꿀벌, 윤배박님)으로 불렀다.    

  





 남편과 난 동갑이다. 어느 동갑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이름을 부르며 연애를 했고, 애칭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중에


 “(남편의 이름)는 지금 운동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본인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어른들과 대화할 때, 본인의 이름을 ‘신랑’ 또는 ‘~씨’, ‘남편’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씨’는 동갑커플 입장에서 부를 때마다 너무 소름이 돋는다. 정말  - 불가다. -

 나는 남편의 이름을 말해야 할 때마다 ‘~씨’라고 말했다가 어색함에 몸을 비비 꼰다. 이름을 말했다가, “아아! 신랑이.”라고 말을 고치면서 ‘왜 이래야 할까.’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넘게 한다.

 남편은 자발적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남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실수를 한 사람처럼 움찔하게 되었다.

   

 바꿔야 할 것들이 생기면, 속으로는 반항심이 생겨 불만이 가득해진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중얼중얼거리다 남편의 단호한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결국, 조금 비겁하지만 티 나지 않게 이름과 호칭을 섞어 말하고 있다.


 결혼을 하고 내가 이토록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남편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 자유를 하던 사람이었다. 함께 살다 보니 그의 새로운 면을 많이 발견한다. 이런 보수적인 모습들.     





 


 결혼 생활을 하면 혼자 일 때와 다른 내 모습에,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초조함이 든다. 그래서 나는 독립투사처럼 그를 깨물고 발을 동동거리며 내 자유를 지키려고 애쓴다. 가끔 나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울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남편이 나랑 정말 똑같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똑같으면 별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 싸우면서 정도 많이 들었는데. 똑같으면 얼마나 재미없겠냐.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노래가 나온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위안한다.

 남편도 그럴 것이라 생각 든다. 나를 보고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고 말할 때가 많은데,  왜 저러나 싶을 때가 많나 보다.

 





 잘잘못을 따져가며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질 때가 있다. 결국, 그래서 규칙을 만든다. 내 패를 하나씩 까고, 상대에게 넘겨준다. 서로의 패를 섞으면서 휴전 협정을 한다. 상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규칙을 만든다. 정말 영원히 멀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 규칙을 지키다 보면 생각보다 좋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서로가 다 잘 되자고 하는 말이다.      

 또다시 서로가 너무 똑같으면 별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과 내가 이렇게 달라서, 둘이 사는 게 재밌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와 둘 사이. 둘이 함께 살고 싶어 하나씩 내놓는 관계.

 하나보다는 채워지지만 둘보다는 부족한 사이, 당신과 나의 관계. 사이의 여백을 알기에, 조심하게 된다.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건, 함께 의지하기 때문일 테지. 기쁜 일은 두배가 되어 행복해지고, 슬픔은 그에게 넘겨준다. 물론, 화가 두 배로 날 때가 많지만 덕분에 시트콤 같은 일상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남편(男便)의 한자 뜻을 살펴보면 사내 남과 편할 편으로 되어있다. 편한 남자라는 뜻?. 비슷한 뜻으로 아내는 여편(女便) 네가 있다. 편한 여자라는 뜻일까. 함께 사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혼자보다 좋을 때가 많다. 상호협력조약에 익숙해져 편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어쩜 이런 생각을 했대! "당신 없이 못 살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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