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일이다. 두릉(杜陵) 지방에 위고(韋固)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찍 아내를 맞고 싶어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여행을 하다가 송성(宋城) 남쪽의 객점에 묵게 됐다. 그날 밤 산책에 나선 위고의 눈에 문득 한 노인이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의 옆에는 또 큰 포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는 붉은색 실이 가득했다.
호기심을 느낀 위고가 노인에게 다가가 정중히 물었다.
"어르신,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노인은 "천하 남녀의 혼인에 관한 인연을 기록한 책이라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더욱 호기심을 느낀 위고는 "그럼 포대에 든 이 홍실은 어디에 쓰시는 겁니까? "라고 물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 홍실은 장차 부부가 될 남녀의 손발을 묶는데 쓰지. 그 두 사람이 설사 원수의 집안이거나 이역만리 떨어져 있거나 또는 빈부차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이 홍실로 한데 묶어놓기만 하면 결국에는 부부가 된다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천리의 인연이 한 가닥 줄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의 유래다. - 이복언이 지은 '속현괴록(續玄怪錄)'에 등장하는 '월하노인' 中 -
난 처음 소개팅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주선자의 친구로, 심지어 소개팅남도 아니었다. 심심한 차에 친구 소개팅에 낀 눈치 없는 캐릭터.
결국 어쩌다 보니 남자 쪽 주선자와 소개팅남, 주선자 친구인 지금의 남편, 여자 쪽 주선자와 나 이렇게 다섯이서 함께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자리에앉자마자 분위기가 다 같이 친구로 지내야 할 것 같아서 내숭 없이 신나게 술을 마셨고 소개팅은 그냥 술자리가 되었다.
남편은 내가 웃기다며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고 자연스럽게 번호도 물어봤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몇 번 만나기도 했다. 당시에 남편에게 연애 조언도 해줬었는데.... 그렇게 틈틈이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늘고 긴 인연을 이어갔다.
3년 전, 기록적인 한파로 인해 롱 패딩이 유행하던 추운 겨울, 심심하다며 내가 일하는 곳 근처까지 놀러 온 그를 볼 때까지도 오랜만에 만난 남사친이었을 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함께 감자탕을 먹고 커피숍에 가 차 한잔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연애상담 비슷한 류였는데, 그는 여전히 눈치 없고 순수한- 여하튼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지퍼를 잡아당기고있었다. 나를 바라보면서 "아휴, 잘못 끼웠나 봐. 못하겠다. 도와줘"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에게 다가갔는데, 이 시점이 관계의 터닝포인트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지퍼를 만지작 거렸는데, 너무 가깝게 붙어있게 되니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10년 전 기억 속에는 왜소하고 웃긴 애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어깨도 넓고 키가 크네.. 못 본 사이에 운동을 많이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를 올려다봤는데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랬나. 갑자기 훅 남자로 느껴지더니 좀 부끄러웠다. 갑자기 '아... 왜 생얼로 나왔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퍼를 풀지 못하고 "야! 그냥 니가 해!"라고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가 그를 처음 남자로 본 순간이다. 고장 난 지퍼가 한순간에 그를 웃기고 눈치 없는 사람에서 남자로 승급시켰다. 그 이후에는 뭐.. 연인이 되었다. 여행을 많이 다녔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반복했고, 지금은 남편이 되어 계속 반복 중이다. 고백은 남편이 먼저 했는데, 자꾸 내가 꼬신 거라고 말한다.
하필 그 순간에 나를 심쿵하게 만든 패딩 때문이지, 내가 꼬신 건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의 직업은 군인이다. 그는 청첩장에 나라를 지키는 마음으로 가정을 만들겠다고 적었는데 결혼생활에서 이를 잘 실천하고 있다. 전쟁 같은 싸움을 수없이 치렀다. 부부싸움에서는 위치 선점이 중요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나는 거실을 점령하고 남편을 안방으로 몰아붙인다. TV를 점령하며 소파를 차지한다. 나라를 지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전쟁에 임한다. 싸운다. 토론하고, 방법을 찾고, 부딪힌다. 이해되지 않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힘들어서 천장을 보고 대화하고 서러워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상상 이상의 인내가 필요하고, 고뇌하게 만드는 결혼생활.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가보자!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건한 마음으로 그렇게 가정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청첩장에 적은 이야기
신기하게도 남편은 10년이 지났음에도 나를 처음 만난 그날, 그 소개팅 같지 않은 소개팅에서, 내가 입은 옷과 대화, 얼굴,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난 반대로 아직도 심쿵 패딩이 생각난다. 그때 입은 옷, 함께 나눈 (다른 여자)이야기, 그리고 지퍼. 와 같은 것들.
만약 남편이 그날 소개팅 자리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어졌을까. 남편이 코트를 입었거나, 지퍼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연인이 되었을까.
'운명의 붉은 실' 이야기처럼 누군가 보이지 않은 홍실을 묶어놓은 것 같다. 돌고 돌아 우연히 만났고, 인연이 닿아 부부라는 연(緣)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남편의 다리를 베고 누워 그의 배꼽에 손가락을 넣는다. 그는 나를 살짝 한심한 듯 쳐다보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다. 손가락을 넣었다 빼고, 배를 만지작 거리며 좋아한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기분이 좋다.
남편은 사용한 수건을 매번 그대로 걸어놓는다. 그리고 내 수건도 옆에 걸어놓는다. 나는 더 이상 닭다리를 양보하지 않으며, 짐 싸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뽀뽀는 계속 요청한다.
사고가 났던 남편은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지만 아직 집으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내년 생일도 그를 위해 미역국과 불고기를 해줄 예정이다. 물론, 선물도 맘대로 고를 예정이다.
정답을 알지 못해 헤매지만, 그래도 재밌게 살고 있다. 요컨데, 작고 가볍고 사소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결혼생활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겨울에는 보일러 온도를 24도로 맞춰놓고 이불을 여러 겹 덮고 자는데, 이상하게 자고 일어나면 22도로 내려가 있다. 범인은 남편이다.
그는 반대로 더위를 잘 탄다. 그래서 이불을 잘 덮지 않는다. 덥다고 발로 휙휙 차는데, 빼꼼 나온 배가 차가워져서 배탈이 날까 걱정이 된다. 배를 내놓고 잠을 자서 얇은 이불을 몇 번이고 덮어줬다. 결국, 남편 전용 얇은 이불을 만들어 줬다. 그렇게 우리는 한 침대에서 각자의 이불을 덮고 잔다.
겨울 내내 온도로 씨름했다. 남편은 내가 한 눈을 팔 때 22도로 내려놓고, 난 남편이 한 눈을 팔 때 24도로 맞춰놓는다. 아마 이번 겨울도 온도를 조절하며 지낼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