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식 올 거지?"
그녀의 책상 앞으로 하이얀 청첩장이 놓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청첩장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던 지인은 이런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했다.
저 이죽거리는 입매에 자신의 주먹을 내리꽂는 상상. 기름진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는 한 컷.
그랬다. 청첩장을 내민 남자는 지인과 몇 년이나 '썸'을 타던 썸남이었다. 몇 년을 밀당하더니 결국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하는 걸로 모자라 썸녀였던 자신에게 청첩장을 내미는 이런 뻔뻔함이라니. 그런데 그의 뻔뻔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썸남과 결혼하는 여자, 그러니까 그의 신부가 될 사람이 자신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죽고 못 살 정도로 붙어다니던 단짝 후배였다는 것.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어 지인은 그저 웃는 얼굴로 예비 신부에게 "00아, 결혼 축하해." 라는 말을 뱉어버렸다고 했다.
무색하고 민망하고 어이없고.
정말 한순간 멍청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지인과, 한때 지인의 썸남이었던 그, 그리고 그의 예비 신부의 관계는 그랬다. 퇴근 후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였고 같은 회사 동료였으며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흔하지 않게 우정이라는 것을 나누고 쌓는 그런 사이.
그러다 남자와 지인은 어느새 썸남 썸녀로 발전을 했고, 예비 신부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지했다는 것.
썸의 관계가 시들해진 어느 무렵부터, 엄밀히 말하자면 썸의 기간이 너무나도 긴 탓에 서로가 감흥을 잃어가던 그 즈음부터 후배와의 사이가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남자와의 썸도 완벽히 끝이 났다는 것.
그렇게 시간이 1년쯤 흐른 지금, 썸남과 후배가 나란히 서서 자신에게 청첩장을 내밀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허락 같은 걸 구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구구절절 자신에게 무언가 이해관계를 읊을 이유가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사람의 '도의'와, 예전처럼 돈독하지는 않더라도 의리 정도는 지켜줄 수도 있었건만.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은 '관계'였다는 것에 지인은 마음이 한없이 우르르르... 무너졌다고 했다.
시간이 지났다지만, 그래도 한때 서로가 서로한테 쌓아온 시간이란 게 있을 텐데. 알 수 없는 찝찌름한 기분과 그로 인한 불쾌한 감정이 혀끝까지 올라와 쓰게 맴돌았다고 했다.
지인의 말을 담담하게 듣고 있다보니 몇 년 전 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일화가 생각났다.
한참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던 남자는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게 내 절친이었다. 물론 나는 썸을 탔던 건 아니었지만. 남자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지인이 말한 그 찝찌름한 이상 기분에 덧댄, 혀끝까지 차오르는 쓴 맛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때의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냥 황당함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내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가 나의 친구와 연애를 한다고 했다.
친구 커플이 도덕적으로나 어떤 도의적으로나 내게 실수를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아닌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리만치 찝찝했다.
이런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도 알 수 없는, 조금 더러운 컵으로 물을 마시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렇게 2년쯤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은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곧 신부가 될 친구가 내게 부탁을 해왔다. 결혼식 축사를. 나는 마음을 다해 정성스레 준비한 축사를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내가 두 사람의 축사를 써주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런저런 살짝 복닥거리는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의 일화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돌아온 답에 마음이 울컥- 불덩이 같은 게 하나 울끈, 하고 치솟았다.
"너 그런 게 제일 나쁜 거다? 그런 거잖아. 너 갖기는 애매하고, 남 주기는 아깝고 그런 거. 그런데 네 친구가 그 사람이랑 결혼한다니까 좀 빈정 상하고 그런 거."
축사는 온데간데없이.
그러니까 결국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못나빠진x라는 것이 아닌가. 쫓아다니던 애매한 놈이 내 친구랑 결혼하는 꼴 같은 건 봐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인사.
그런 꼴을 봐주지 못했다면 애저녁에, 그러니까 그 애매한 놈이 내 친구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안 그 때에, 나는 그녀와 친구의 연을 끊고야 말았을 것이다.
친구가 말한 그런 애매한 놈 때문에, 그래서 친구 연 끊자고 덤비면 오히려 없어 보일까봐, 그깟 자존심 하나 붙잡자고 절교 선언도 못할 만큼, 그렇게 못난 인사는 아니니까. 내가.
그래서였다. 나는 조근하게 '이 따위' 막말을 늘어놓는 친구에게 조금 날을 세워 되받아쳤다.
"야. 너는 빈정 상한 친구한테 축사를 써주냐? 꼴랑 나 좀 좋아했던 남자 놈이 내 친구랑 결혼한다고 그 꼴을 못 봐주는 거라고? 웃기시네."
통화 끝에, 썸의 정의는 어디까지일까, 라는 생각 하나가 스쳤다.
썸이라는 건, 사귀기 전에 서로를 탐색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직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사귀는 듯이 가까이 지내는 관계.
그러므로,
썸에도 시간과 공간과 추억이 공존한다. 그런 기억도 더듬지 못할 거라면, 그걸 무언가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까.
썸에도 엄연히, 감정과 마음이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그래서다.
연애 후 이별에 애도기간을 스스로에게 선사하듯,
어쩌면 썸에도 애도기간이란 게 필요한 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