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해주 Mar 09. 2019

엄마의 소녀기

시골에 있는 딸을 보기 위해 외할머니가 아침부터 부산하다. 바리바리 뭘 그리도 많이 준비하는지. 벌써 냉장고 문은 열댓 번도 더 열었고, 열흘 전 미리 남대문에 가서 사다놓은 파스며 각종 약품이며 몇몇 옷가지들까지 참 고루고루 꼼꼼하게도 챙긴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다 마침내 한 소리를 한다.


"유 여사, 아니 뭘 그렇게 많이 싸~ 그걸 다 어떻게 가지고 간다고. 참내..."

(유 여사는 내가 외할머니를 부르는 애칭이다)


"아이고 이것아 말 말어. 할미가 다 지고 가든 이고 가든 할 테니까"


할머니의 지청구에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관망자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할머니의 짐 싸기가 끝이 나는 듯 보였다. 챙겨 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뭐 빠뜨린 건 없는지 마지막 점검을 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딸네 가는 게 저리도 좋으실까' 싶어 설핏 웃음이 배어나왔다.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아 하는 들뜬 할머니의 모습이 어쩐지 소녀 같기도 하고, 수줍음 가득 품은 처녀 같기도 해서 .

이래저래 한가득 마련한 짐이 부담스러워 운전을 해서 모시겠다고 해도 할머니는,


 "까페칸이 얼마나 좋은데~ 나 까페칸 타고 갈 거야"


고집 하는 바람에 그 많은 짐을 둘이서 이고 지고 결국 기차에 올라탔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까페칸에 올라타 커피도 마시고 꼬치소시지도 먹으면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할머니를 보니 답답한 자동차가 아닌 기차를 선택한 것에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쁨이 물 밀 듯 밀려왔다.

한 여름의 엄마는 땀방울이 마를 새 없이 바빴다. 제대로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다시 과수원밭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잔뜩 실어온 짐을 하나하나 풀어 한쪽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현관문 데스크에서 숨을 휴우, 하고 몰아쉬며 탁탁-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였다. 엄마는 잠깐도 쉴 새가 없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밥통에 쌀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느라 분주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할머니가 엄마에게는 들릴 듯 말 듯한 어투로 조용히 말했다.


"니 애미가 왜 저러나 모르겠다. 처녀 적엔 갓난쟁이 엉뎅이 마냥 말랑말랑 순딩이였는데..."


시골 억척이가 다 된 엄마를 보며 외할머니가 종종하는 말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예 엄마를 불러두고 한 마디를 하신다.


"너는 젊은 애가 얼굴이 그게 뭐냐. 여자가 좀 꾸미기도 하고 그래야지. 밭에 나갈 때 썬크림 같은 것도 안 바르냐."


하면서 자신의 가방에서 썬크림과 영양크림을 꺼내 엄마 앞으로 밀어둔다. 엄마는 처음엔 할머니 말이 진짜 그런가 싶어 자신의 푸석한 얼굴을 매만지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영양크림과 썬크림을 물끄러미 바라다봤다. 그러더니 뭐가 그렇게 복받치는지 울먹울먹이다 속에 것을 다 토해내는 것 같이 울어대며 말을 하는 거였다.


"엄마는, 내가 안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새벽 4시, 5시에 일어나서  나, 제대로 끼니도 못 먹으면서 저 밭 하고 하루종일 치덕치덕 하고 있어. 그러고 집에 오면 파김치 돼서 쓰러져 코골기 바빠. 그런데 나한테 뭘 하라는 거야! 나도 이 시골이 이젠 진짜 싫어!!"

엄마는 두 손으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썩썩 문대더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버렸다. 그 자리에 있는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할머니부터 살폈다. 할머니는,


"에휴, 늙은이가 괜한 소릴 해서 괜히 맘만 심란하게 했어. 늙을수록 밉상이라더니, 내가 꼭 그짝이네"


하시면서 썬크림과 영양크림을 들고 엄마의 화장대로 가셨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그저 위로를 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당신은 쓰지도 않는 썬크림까지 챙겨와서 말이다. 밖에서는 서럽게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엄마를 저렇게 서럽게 한 것이었을까.

한참을 한 많은 여자처럼 통곡 비슷한 걸 뿜어내던 엄마는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퉁퉁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해가지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 곁으로 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별대수롭지 않다는 듯 엄마의 수다를 맞춰주었다.

 요즘 우리 엄마는 작은 일에도 감정 컨트롤을 힘들어 한다. 밥을 먹다가도, 주변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하다가도 괜시리 눈물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쩔 때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라 곧 시집이라도 가는 꽃처녀마냥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도 한다. 이런 우리 엄마의 병명은 갱년기다. 사춘기보다도, 중2병 보다도 더 강력한 갱년기.

 어쩌면 엄마는 지금 갱년기라는 이름 아래 엄마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닐까? 울고 싶으면 울고, 화내고 싶으면 화 내고, 위로 받고 싶을 땐 딸이나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한두 시간쯤은 너끈하게 자신의 수다를 늘어놓으며 마음을 풀어내는.

 우리 엄마는 지금 가장 강력한 소녀기에 접어든 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