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보내는 쪼~금 긴 메모 29

외국회사 입사기 대방출(?)

by 김현정

우리는 함께 출발했었다.

같은 영상병리학과, 같은 병원, 같은 인턴 명찰.

그가 정직원으로 채용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또다시 면접 탈락 메일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밀어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 실패가 더 선명해졌다.

그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 다만 나는, 계속 실패하는 나를 누군가의 성공 옆에 놓을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는 이런 말이 당연하게 통용됐어.


“여자는 직장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면 되니까 굳이 안정된 직장을 가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요즘은 다르지.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교육받고 똑같이 취업을 준비해.

함께 병원 인턴십을 하며 입사를 꿈꾸던 어느 연인처럼 말이야.

두 사람은 같은 전공, 같은 꿈을 꾸었는데, 남자는 정직원이 되었고 여자는 탈락했어.

여자는 다른 병원에서 다시 인턴을 하며 기회를 찾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결국 그녀는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손을 놓아버렸어.

정말 잘 어울리는 연인이었는데, 끝내 헤어지게 되더라.


취업.

정말 겉으로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주제야.

해가 갈수록 문은 좁아지고, 이제는 AI 시대까지 겹쳐서 일자리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

아마 너도 요즘 공부하면서 매일같이 미래를 걱정하지?

계획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불확실성 앞에서 한숨 쉬는 날도 많을 거야.

나도 그랬어.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할 무렵 내게 주어진 현실은

“중소 무역회사라도 들어가면 다행이다”였어.

내 스펙이라곤 한글 타이핑 좀 하고, 영어를 읽고 해석할 줄 안다는 정도였지.

전공 지식? 취업에서는 배운 내용보다는 학점이 면접에서 더 말이 되더라.

“공부는 열심히 하셨네요.” 이런 말.

지금 돌아보면 국문학과에 갔으면 글쓰기에 더 도움이 되었을까 싶기도 해.


어쨌든 나 역시 좁은 취업문 앞에서 낙담을 반복했어.

첫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기 일주일 전,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줄 아는가’보다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가’를 먼저 떠올렸어.

그건 외국계 회사였지.


문득 생각난 건, 학기 중 과 사무실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할 때 봤던 작은 책자 한 권이었어.

그 안엔 지방에 있는 외국회사 리스트가 있었지.

나는 그 리스트를 받아와서, 하나하나 전화를 걸기 시작했어.


“안녕하세요. 저는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요, 혹시 직원 채용 계획이 있으신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모두 “계획 없습니다.”였어.

지쳐가던 순간, 마지막이다 싶어 누른 전화에서

상대방이 “잠시만요” 하더니 대표에게 연결을 해줬어.


“우리가 사람 뽑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대표의 첫 질문이 그거였어.

외국계 회사는 보통 공채가 아니라 추천으로 채용하거든.

그러니 내 전화를 이상하게 여긴 거지.

결국 나는 그 회사에 입사했어.


어떻게?

너무 간절했기에, 면접에서 ‘허풍’을 조금 보탰지.


“영어 잘하고요, 영어 타자도 빠릅니다. 본사랑 직접 소통하며 비서 역할까지 할 수 있어요.”


나중에 들으니, 나보다 능력 있는 경쟁자는 일정 임금을 요구했지만,

나는 “뽑아만 주신다면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라고 했다더라.

아마 낮은 임금 요구와 뻥 친 자신감이 문을 열게 한 것 같아.


하지만 내 뻥은 입사 하루 만에 들통났어.

영어 타자 속도는 독수리 타법, 회화는 거의 불가능.

곧 해고될 수도 있었지.


그런데 버틸 수 있었던 건,

본사가 미국 휴스턴에 있었고 시차 때문에 직접 통화할 일이 드물었어. 그리고

나는 사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캐비닛 속 서류들을 살피다가 ‘기회’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

매일 밤 집에 가서 영어 타자 연습을 했고,

캐비닛의 서류들을 가져가 읽고 해석하며 업무 흐름을 익혔지.

그 내용을 엑셀에 정리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도록 준비했어.

운 좋게도, 대표가 그런 내 노력을 좋게 봐준 것 같아.

그렇게 난 그 회사에서 8년을 다녔고, 후회 없는 첫 커리어를 만들 수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엄마의 회사 입사 기를 왜 길게 말하냐고?


만일 엄마가 SNS에 아래와 같은 썸네일을 만들어서 ‘외국회사 입사법’ 영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 외국계 회사 입사법 대방출!

영어? No.

스펙? No.

독수리 타법? OK.

필요한 건 단 하나,

☎ 전화기를 들 용기였습니다.

채용 공고? 필요 없습니다.

회사 리스트 뽑고, 하나씩 직접 전화!

면접? 자신감으로 뻥 한 스푼.

입사? 캐비닛 뒤져가며 타자 연습하며 버팁니다.

� "열정만으로 외국계 회사 입사 가능?"

� 가능합니다.


어때? 이런 영상을 볼 마음이 드니?


하지만 말이야,

내 외국회사 입사기 체험담의 진짜는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지독히 현실적’이라서 의미 있는 거야.


하루에 몇 번씩 거절당하며 전화기를 들던 내 손은 떨렸고,

면접에서 내뱉은 말의 절반은 사실 ‘간절한 허풍’이었지.

입사 후엔 독수리 타법으로 쩔쩔맸고, 해고될까 봐 매일 숨죽여 지냈어.

퇴근 후엔 서류를 들고 가서 하나하나 해석해서 업무 루틴을 찾아냈고,

영어 타자 연습에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했어.


그러니까,

SNS 속 “외국계 회사 입사법 대방출”, “3개월 만에 억대 연봉” 같은 문장은

간절함도, 좌절도, 두려움도 지워진 성공의 일부 조각일 뿐이야.


진짜 중요한 건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불안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작은 실행’이라는 걸,

그때의 내가 알려주더라. 나는 그걸 너와 공유하고 싶은 거고.


그래서 나는,

사랑했지만 자신의 실패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이성과 이별했던 그 여자에게도,

그리고 지금 불안 속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너에게도 말해주고 싶어.


“비교하지 말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그런 말, 너무 교과서 같아서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이야.

불안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작게라도 한 걸음 내딛다 보면

기회는 분명 온다는 걸

나는 내 경험으로 배웠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SNS에 떠도는 성공 서사의 반짝이는 문장 뒤에는

지워진 맥락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그들이 말하는 ‘3개월’에는

사실 3년의 실패,

부모의 지원,

우연한 기회,

보이지 않는 울음과 고독이 숨겨져 있다는 걸.

그러니

누군가의 결과를 부러워하기 전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먼저 바라봐 줘.

첫걸음이 작고 어설퍼도 괜찮아.

멋지지 않아도 괜찮아.

중요한 건,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거니까.


추신: 대표님, 부족한 저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기회를 주신걸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의 어눌한 영어 소통력과 독수리 타법, 영어 타자 속도에 기겁하신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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