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노릇에도 '눈치'와 '자본'이 필요하다

분홍 원피스라는 대물림

by 해림


연분홍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큰손녀가 나풀거리며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섰다.


손녀가 입은 그 옷은 유치원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할머니인 내가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이다. 백화점 매장을 수없이 뱅뱅 돌다,


결국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는 실패가 없다’는 나만의 공식을 믿고 선택한 옷이었다. 손바닥만 한 아이 옷값이 웬만한 어른 옷보다 비싸 카드를 내미는 손이 잠시 떨렸지만, 옷을 보고 환호할 손녀를 생각하며 과감히 결제했다.


아이들 옷에 관해서라면 나에게는 나름의 고집이 있다. 두 딸을 키울 때도 옷만큼은 무조건 백화점에서 구입했다.


금방 자라는 아이들에게 비싼 옷을 사주는 일이 낭비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되도록 이름 있는 브랜드를 입히려고 애썼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계 형편이 기울자 어머니는 외동딸인 나에게조차 예쁜 원피스 한 벌 사주지 않으셨다. 지독한 절약의 화신이었던 친정어머니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자, 내 안의 결핍이 만들어낸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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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서른 아홉번째 봄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지금은 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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