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잎 없는 가지에 핀 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솟아난 꽃망울부터, 푸른 잎을 틔우고 단단한 초록 매실을 맺었다가, 다시 잎을 버리고 침묵하며 다음 해를 준비하는 그 생애 전체를 사랑한다. 땅속 깊이 뻗은 뿌리와 그 가지에 잠시 쉬어가는 직박구리의 지저귐까지 모두 포함한 매화나무의 온전한 사계(四季) 를 말한다.
사실 예전엔 나는 꽃나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매화 같은 조경수가 흔치 않았다. 그저 잎이 넓적하고 꽃도 피지 않는 플라타너스만이 길가를 메우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매화는 어머니의 문인화 속에서 보았던, 검은 먹물 자국 사이에 뜬금없이 찍혀 있던 분홍빛 흔적이 전부였다.
그러다 십여 년 전, 벗꽃만 흔하던 주변에서 매화나무를 실물로 '영접'했다. 그것도 추위가 채 가시지 날 그늘진 아파트 뒤뜰에서 확실히 만났다.
살벌한 맹추위가 지나고 며칠간 온화했던 날이었다. 세탁기를 돌리려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마른 나뭇가지에 작고 토실한 꽃몽우리들이 몽긋 하게 달려 있었다. 벗꽃과는 달랐다.
매일 산책을 즐기시는 어머니는 그것이 매화라고 일러주셨다. 기온은 여전히 영하를 오르내리는데, 무엇이 그리 급해 벌써 꽃을 피웠는지 그 부지런함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뭐 하러 벌써 나와서 얼어 죽으려고 그래?"
꽃과 대화까지 나누며 노심초사했다. 공연히 눈에 담았다가 내 걱정거리 목록에 추가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추위가 물러간 자리에는 초록 열매가 가득 맺혔다.
매실의 초록은 보통의 초록이 아니었다. 생명력이 응축된 '쨍한' 초록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던 매실액이 이토록 고결해보이는 나무의 자식들이었다니, 새삼 경외감이 들었다.
자녀들이 독립하고 마음 한편에 한 뼘 정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베란다에서 매실액 담그기를 시작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노란 설탕 속에서 삼투압을 견디며 쪼그라든 매실을 걸러내고, 메이플 시럽 같은 진한 액체를 수확하는 기쁨은 상당했다. 소화력이 약한 우리 부부에게 매실액은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였다.
지난해에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 화단에서도 매화나무를 발견했다.
건물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꽃을 피우고 매실을 맺더니, 하루에 몇 알씩 땅으로 툭툭 던져놓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나무에 관심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운동장을 돌던 나는 땅에 떨어진 매실들을 쓰다듬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비바람이 치고 나면 상처 입은 채 떨어지는 것들이 늘어갔다. 나는 살아남은 놈들을 칭찬하며 집으로 가져와 정성껏 씻고 설탕과 함께 유리병에 '모셨다'.
시장에서 사 온 매실 두 자루도 큰 병에 저장했지만, 학교 화단에서 건져 올린 것들은 나의 '반려 매실'이 되어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발효되어 갔다.
남편은 열매 손질이 힘들다며 더는 주워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기분 탓일까?
무농약이라서 그런지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 학교 화단표 매실액이 다른 것보다 훨씬 향긋하고 깊은 맛을 냈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결백, 고결, 인내, 기품을 상징한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눈 속에서 꽃을 피우며, 꽃샘추위마저 이겨내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고는 다시 화려했던 봄날을 잊은 채 묵묵히 다음 겨울을 준비한다. 이 얼마나 근사한 삶의 태도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바닥에 시커먼 흔적을 남기는 벚꽃에 비하면 매화는 절제의 미학을 안다. 게다가 툭툭 매실을 안겨주어 맛있는 결실로 보답해 주니, 내가 매화나무를 닮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비바람에 떨어진 작은 열매 하나에서도 생의 의지를 읽는다. 나 또한 매화나무처럼, 시련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에게 향긋한 위로가 되는 존재로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