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서서

by 해림

우리 학교에는 수호나무가 있다. 교문 입구에 오랜 세월을 견딘 굵은 몸통과 위풍당당한 기개를 자랑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났을 때, 나는 그 떡 벌어진 골격과 잘생긴 외모에 살짝 압도당했다. 그때부터 나는 교장으로서 교목인 태산목을 제치고, 이 느티나무를 내 마음 속 수호나무로 정해버렸다.


조경업자의 말에 따르면 족히 쉰 해는 되었을 거라는 나무. 학교가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어졌을 거라 짐작한다.


이제 60대 중반인 나의 오빠도, 환갑이 된 나의 남동생도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니, 그들이 어린 시절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묘목이 이제는 의젓한 어른 나무로 학교를 지켜온 셈이다.

반세기 이상 운동장에서 벌어진 수많은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이 나무는 학교의 산증인이자 지킴이가 틀림없어 보였다.


매일 점심 식사 후, 나는 행정실장, 교감 선생님과 학교를 한 바퀴 돈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현안을 의논하다 보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티나무 아래로 향한다. 거대한 나무를 우러러보며 감탄하는 일은 이제 나의 기분 좋은 습관이 되었다.


느티나무 그늘에 서면 학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고 시원한 그늘 속에서 나무의 오묘한 정기가 전해져 오고, 바람이라도 슬쩍 불어오면 잎들이 일시에 일렁이며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흩트린다. 마치 “잠시 고민을 내려놓고 쉬어가라”는 나무의 속삭임 같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시간에 균열이 생겼다. 담장 너머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전해진 것이다.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이 성가시고, 담장을 넘은 가지들이 불편하다는 항의가 매년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상생을 위해 가지치기를 결정했고 조경업자들을 학교로 불렀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서둘러 핸드폰 켜고 느티나무의 위용을 사진에 담았다. “너무 달랑 자르지 마시고, 예쁘게 손질해 주십시오.” 인부들에게 거듭 당부했다.


잎이 무성한 초여름에 전지를 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가지의 30%가 이웃 담장을 넘어가 있으니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잘려 나가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래된 나무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맴돌았다. 죽이는 일은 아니라 해도, 오십 년 넘게 평온하던 나무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터였다.


상처 입는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가만히 읊조렸다.

“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란다. 조금 손질하고 나면 앞으로 더 멋지게 자랄 수 있다고 하니, 부디 너무 성가시게 생각하지 마렴.”


작업이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다시 나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개를 젖혀 우러러보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파트 쪽 가지들이 무참히 잘려 나간 탓에, 나무는 한쪽으로 흉하게 치우쳐 균형을 잃고 말았다. 까다로운 이웃 덕분에 수호목은 초여름 한복판에 헐벗은 처지가 되었다.


쉰 해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은 느티나무가 이웃의 청결을 위해 제 몸의 삼분의 일을 내어주었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생겨 이 나무의 몸통과 뿌리까지 위협받을지 모르는 세상이다.


내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흔 넘게 장수한다면, 그때도 이 느티나무가 건재한지 꼭 확인하러 오고 싶다. 부디 사나운 사피엔스를 만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가지를 치고 난 후, 둥지를 잃은 새들이 며칠째 허공을 헤매고 있다. 우리는 ‘불편함’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의 자리를 뺏고 있는 것일까.


헐벗은 느티나무 아래 서서 가려진 곳 없이 훤히 드러난 나무의 속살을 마주하니,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든다.


* 작년 초여름 학교 느티나무를 가지치기 한 후 기록했던 글입니다. 작품 '교장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요'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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