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 생활 37년 4개월 만에 비로소 교장 자격 연수의 문턱에 섰다. 지인들은 ‘교직의 꽃’이라며 축하를 건네지만, 정작 나는 헛웃음을 삼킨다.
관리자들조차 명예퇴직 대열에 합류하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노련하다 못해 쇠락해가는 교장의 탄생이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 교장이란 지향점은 없었다. 베이비부머 세대 관리자들이 남기고 간 거대한 공백이, 준비되지 않은 내게도 예기치 못한 소임을 안겨준 셈이었다.
쉰 고개를 넘긴 뒤로 내 다이어리의 2월 마지막 날은 언제나 ‘명예 퇴직일’이라는 가상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아이들과의 거리감은 심연처럼 깊어졌고, 연륜으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심리적 소모는 감당하기 벅찼다.
그렇다고 승진에 목을 매자니, 곁에서 지켜본 관리자들의 모습에 실망할 때가 많았다. 나는 “관리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관리자가 되니 우습기 짝이 없다”며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그 냉소의 끝에서 문득 어머니를 떠올린다. 나의 어머니는 40년을 평교사로 사셨다. 학교에 대한 충성과 학생을 향한 연민밖에 모르는 우직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년 단축이라는 시대의 급류 앞에 어머니는 서둘러 짐을 싸야 했다.
퇴직하시던 날, 텅 빈 운동장을 엄마와 나란히 가로질러 나오던 기억이 생경하다. 종이 가방 속에는 아이들이 남기고 간 낡은 몽당연필과 잉크 말라가는 볼펜들이 뒹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때 묻은 학용품을 차마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뒷모습은 유독 쓸쓸하고 초라하게 박제되어 있다.
요즘의 퇴임식은 더욱 건조하다. 강당 퇴임식은 고사하는 구습이 되었고, 공로패는 처분하기 곤란한 짐이라며 사양한다. 훈장마저 마다하고 책상 위 티끌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돌아설 때, 그들의 뒷모습에선 어머니의 시대와는 또 다른 허무가 비친다.
세상은 명퇴 교사들을 보며 '연금이 있으니 좋겠다'며,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풍족하게 살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기여금을 더 내고 더 길게 재직한 결과인 연금의 잣대로만 교직의 마침표를 재단하는 시선들이 교사의 마지막을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나 역시 급변하는 파고 속에서 늙은 교사가 온전한 존경을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나의 가장 절박한 ‘학교 탈출’ 명분이기도 했다. 이토록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탈출구를 찾던 내가 교장 연수를 받게 되다니,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다.
연수를 몇 주 앞두고 중환자실에 계시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언을 받았다. 장례 중이라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온라인 연수에 필히 접속하라는 교육청의 대답은 냉혹했다. 과거의 국가는 연로한 교사인 어머니에게 속히 떠날 것을 종용하더니, 이제 교장 연수를 앞둔 내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다행인지, 어머니는 딸이 교장으로 가는 길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밀어주셨다. 연수의 첫 매듭이 지어질 때까지 어머니는 조금씩 생의 기력을 회복하셨다.
이제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 곁을 지키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그 지독한 진심을 이어받으려 한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어 올린 데에는 분명한 소명이 깃들어 있으리라 믿는다.
학교 현장 어딘가에 아직 나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고, 내가 쓰여야 할 자리가 남아 있음을 비로소 감지한다.
세상이 퇴직을 갈망하던 나를 굳이 교장으로 점지한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예기치 못한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