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비료포대의 질주
by
수연
Jan 26. 2026
마지막 사과인 부사의 수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부사는 다른 사과처럼 따서 바로 팔지 않았다. 저장성이 좋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사과였기에, 마을 창고를 대여해 사과 값이 좋을 때를 봐서 팔 수 있었다.
부모님 따라 사과가 가득 쌓인 창고에 들어갈 때면 나무상자의 은은한 나무 향과 사과의 달콤한 향 그리고 어둠이 더해져,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기 전에는 반드시 수확해야 했고, 꼭지를 모두 제거해 다시 상자에 담아 저장 창고로 들여보내야 했기에 한동안 가족 모두 바쁜 시기를 보냈다.
사과밭 한가운데 파란색의 넓디넓은 포장지을 펴고 짚을 깔아 따온 사과를 산처럼 쌓았다. 꼭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창고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가 동원되었다. 따는 사람, 가고(바구니) 나르는 사람, 쪼그리고 앉아 사과 꼭지를 자르는 사람이 있었고, 코앞으로 쫓아오는 겨울을 맞아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사과 흠집 안 나게 조심해래이.」
「손 시려.」
「요것만 하고 불 지펴 줄게.」
「엄마, 언제 끝나.」
「다 끝나가, 저 나무가 마지막이데이.」
몇 번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언제나 ‘끝나 간다’는 말뿐이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힘이 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오늘은 마을 근처에 있는 재고개 밭의 마지막 사과 수확날이었다.
이미 서리가 한 차례 내린 터였다.
수확이 끝난 곳곳의 사과나무 가지마다 얼어붙은 사과 몇 개만이 남아 눈에 띄었다.
그 사과들은 철새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 아니라, 단지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거나 사과 상태가 좋지 않아 남겨진 것들이었다.
결국 그 사과들은 고스란히 서리와 함께 겨울을 맞이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맛이 여기에 있다.
나무에 달린 채 그대로 겨울을 맞아 얼어버린 사과를 살짝 녹여 말랑해졌을 때, 즙을 빨아먹는 그 맛은 겨울을 그대로 입 안에 머금은 듯했다.
추위를 녹이기 위해 지펴 놓은 장작불 앞에서 얼어버린 사과 하나는 겨울을 그대로 입 안에 머금었다가 녹여 먹는 맛이랄까.
겨우 나무 위 사과를 모두 수확하고 끝났나 싶었지만, 엄마는 또다시 사과나무 밑을 뒤져 떨어진 사과까지 모두 줍고 나서야 작업은 끝이 났다.
땅에 떨어져 썩고 상처 난 부위는 도려낸다.
이렇게 팔지 못하는 사과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되었다.
몰라서 그렇지, 멀쩡한 사과보다 조금 상한 자리 근처가 더 맛있다는 건 농사꾼만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상처 난 사과는 보관이 오래가지 않는 게 단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엄마만의 처리 방법이 있었다.
깎고 갈고 다시 거름망에 넣어 즙을 짜냈다.
말은 쉽지만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지금처럼 기계가 없으니 하나하나가 다 수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모아 두었던 빈 음료수 유리병을 끓는 물에 소독하고 사과즙을 넣어 다시 한번 삶아내면, 겨울 내내 천연 사과 주스를 즐길 수 있었다.
그 긴 번거로운 과정을 엄마는 말없이 겨울의 의식처럼 몇 해를 그렇게 반복하셨다.
아버지 또한 벼를 수확한 논에서 떨어진 벼알을 따로 주워와 말리고, 다시 체에 걸러 먼지와 돌을 골라냈다.
그렇게 모인 알갱이는 많지 않았지만, 그냥 두지 않았다.
「이거 밥 한 숟갈이데이.」
아버지 그 말씀에 나는 지금도 웬만하면 밥은 남기지 않았고, 버리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정말 사과수확은 모두 끝이 났다. 가족들 모두 집으로 돌아와 한숨 돌린다.
「저게 오늘내일 새끼를 놓을 것 같은데, 기미(氣味)가 없네.」
「저번에 한 마리 놓티만, 이번에는 두 마리는 놓을라나.」
「염소 우리에 짚 좀 넣어 주소.」
밭에서 돌아와서도 부모님은 배부른 염소에 눈길이 간다.
겨울 내 매일매일 반복되는 큰 숙제는 아궁이의 군불이었다.
한겨울에는 아침, 저녁으로 반복되는 일이었으며, 동물 먹이를 데우고 난방과 함께 뜨거운 물이 있어야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고되고 귀찮은 일이었다.
첫 번째 아궁이에는 이른 아침, 콩깍지와 잘게 잘라진 볏짚을 섞어 넣어 물과 함께 끓여준다. 소와 염소의 첫 끼를 해결하고서야 우리도 그 불을 이용해 지어진 가마솥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볕짚도 일일이 작두에 베어야 하니 이 또한 일이었다.
오늘은 장작불 석쇠에 잘 구워진 고등어다. 농촌에서는 생선 구경이 쉽지 않다. 시내 5일장이 서는 날이면 한 번씩 생선이 밥상에 올라오곤 했다.
마지막까지 정말 버린 게 없었던 것 같다.
식사가 끝나고 밥숟가락 놓고도 고등어 뼈는 다시 석쇠에 얻어, 타지 않을 만큼만 남은 장작불에 바싹하게 구우면 과자처럼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구수하게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첫눈이다. 그것도 함박눈이었다.
얼마나 쌓일진 모르지만 온 동네가 들떠 있는 듯하다.
말 그대로 첫눈 아닌가.
그렇게 몇 시간 만에 산과 들, 마당까지 새하얗게 뒤덮였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에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남긴다.
다음날 동생과 나는 무장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실 무장의 의미는 없었다.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땀으로 모두 벗어던져지고 말았으니까.
「야 가자. 어디갈꼬노.」
「일단 나가자, 애들 모였겠지.」
코앞 마을회관에 이미 아이들이 눈싸움 중이었다.
하루 전 내린 눈이라 더 잘 뭉쳐졌다. 편이 나눠지지 않은 터라 동생은 눈싸움에 끼어들어 함께 맞고, 함께 던졌다.
「아프다, 니 뭐 넣었재?」
「그냥 눈이거든.」
쫓는 아이와 쫓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마을이 떠들썩하다.
나는 집 담벼락의 고이 쌓인 눈을 뭉쳐 본다. 주먹만 한 눈사람을 만들어 경운기 위에 얻어 놓고, 돌을 주워 눈, 코, 입도 만들어 준다. 그러고 나서 나도 무리에 합류했다.
그 후 우리는 비탈진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 농기구가 있는 창고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또 뭔 홈잡질 하노.」
「비료포대 찾는데.」
각자 빈 비료 포대 하나씩을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마을 위 뒷산 입구에 다다랐다.
비료 포대 안에 종이박스를 넣어 엉덩이의 쿠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누가 먼저 내려갈꼬노?」
「돌부터 몇 개 치우자.」
「눈도 좀 덮어놔야제.」
「야 아직 타지마.」
겨울이 시작되고 처음 내린 눈에 우리 모두 들떠 있었고,
주위 분위기마저 어수선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려가기 전,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내려갈 준비를 한다. 비료포대를 눈 아래 두고, 엉덩이를 중앙에 그리고 두 손은 비료포대 양쪽을 잡고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간다. 비켜 비켜.」
「와~ 아프다.」
남자아이들 먼저 소리를 지르며 내려갔다.
「엉덩이 빠개지겠다.」
「나도 간다.」
「야 비키라.」
내려가는 무리와 다시 올라가는 무리,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계절과 자연이 허락한 순간만 가능하기에 이 시간을 맘껏 즐겨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길도 길들여져 매끈해졌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콧물은 흘러내리지만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비료포대가 해지고 엉덩이가 얼얼해질 때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산비탈길에도 어김없이 해가 비치면, 눈썰매장은 일회용처럼 이내 녹아내려 사라진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오빠와 친구들이 마을회관 옆 텃밭에 삽으로 눈을 떠다 쌓고 있다.
「오빠야, 뭐 해.」
「보면 모르나, 미끄럼틀 만든다.」
우리와는 스케일이 틀리다.
삽과 물양동이를 동원해 눈을 쌓고, 다시 삽으로 단단하게 눈을 다진 후 물을 부어 얼려 준다.
위쪽은 높게, 아래쪽은 낮게 해 주면 작은 미끄럼틀이 만들어진다.
마지막 땅끝까지 물을 부어 얼려주면 끝없이 미끄러질 것이다.
오빠들이 다져놓고 놀다 나면 우리들 차지가 될 터니 기다려본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오랜만에 찾은 폭포는 내려오던 물줄기가 그 형태 그대로 얼어버려 있었다.
찬바람에 볼은 빨갛게 트고, 손은 거칠어지고, 발은 동상이 걸리기 직전이지만 상관없었다.
콧물도 안에서 얼어버렸는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단지 좀 불편할 뿐이었다.
부엌과 마당의 수도가 얼어버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가마솥의 뜨거운 물을 수도에 부어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포기한 엄마는 리어커에 내 키만 한 빨간색 고무물통 두 개를 싣고, 끈으로 단단히 묶어 고무통을 리어커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오빠와 우리를 깨우셨다.
「야들아, 빨랑 안 일라나.」
「물 좀 길러온네이.」
이른 아침에 엄마는 벌써 군불까지 넣은 터라 방바닥이 따뜻했다.
군불의 특징은 방바닥, 특히 아랫묵이 철철 끊어져 장판이 누렇게 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흙벽집이라 우풍은 어쩔 수 없었다.
일어나기 싫었지만,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갯소 근처 가서 물 좀 길러온나.」
「이 새벽에.」
「새벽은 무슨, 해가 중천에 떴는데.」
리어커를 끌어야 했기에 힘이 있는 오빠와 언니가 자주 다녔다.
동생과 나는 그저 따라다니며 허드렛일을 거들었다. 한 번은 리어커 바퀴에 걸터 장난을 치다 넘어져 동생의 얼굴에 많은 상처를 입혔던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오늘도 오빠, 언니를 따라나섰다.
「야, 얼음 좀 깨봐.」
「저쪽은 안 얼었어.」
계곡 물마저 얼어버려 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흐르는 계곡물을 조심스럽게 리어커의 빨간색 고무통에 몇 번을 반복하며 옮겨 담고 있다.
「너무 마이 담지 마래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리어커가 돌부리에 걸리고 속도를 내다보면 버려지는 물이 적지 않다.
오늘도 어김없이 물은 넘쳐흘렀다.
「야 너무 많이 담지 말랬재.」
오빠는 앞에서 끌고 우리는 양 옆에서 밀고 그렇게 손가락은 이내 얼어버렸다. 아침부터 힘이 다 빠져버렸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정말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면 수도와 물탱크를 안 입는 옷들을 동원해 모두 감싸보지만, 역부족일 때가 종종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계곡물을 마실 수 있던 시절에 나는 그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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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연재
지나온 시간을 담다
15
윷도, 제기도 없는 건 만들면 그뿐
16
통나무, 간다! 간다! 굴러간다
17
겨울 비료포대의 질주
18
충격과 입맛 사이
19
오곡밥은 바가지에, 분유통은 망구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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