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일간의 남미 배낭여행 1: 불편함이 주는 희열

by 야간비행

1. 익숙함이 준 고독, 새로운 도전의 갈망

지난 3년간 아시아와 유럽을 누비며 베테랑 여행자라 자부해 왔다. 은퇴 후 얻은 '시간의 자유'는 달콤했고, 새로운 풍경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감동의 폭은 좁아졌고,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은 역설적으로 내 영혼을 미세하게 지치게 했다. 고독은 내가 선택한 특권이었으나, 그 안락함이 나를 나태하게 했다.


더 멀리, 더 낯선 곳으로 안락함을 떠나 불편한 곳으로 나를 던져야 했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돈된 풍경 대신, '야생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요동치는 땅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가장 멀고, 육체적 한계를 요구하는 대륙, 남미로 눈을 돌렸다.

사막평원버섯바위.jpg 볼리비아 척박한 고산평원에 서있는 바람에 깎인 돌나무

2. '사서 하는 고생'을 선택한 이유

흔히 60대의 남미 여행이라 하면 마추픽추와 우유니를 중심으로 한 2~4주 정도의 품격 있는 패키지를 떠올린다. 4,000m가 넘는 고산 지대의 부담을 고려해 체력을 아끼는 '관리형 여행'이 주를 이루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배낭여행 카페에서 모집하는 55일간의 '힘든' 여정을 선택했다.

배낭족.jpg 8명의 배낭여행 일행들.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여행했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멨고, 고급 호텔 대신 저렴한 현지 숙소를 택했다. 5개국을 깊숙이 파고들며 10번이 넘는 트레킹을 소화하는 일정이었다. 내가 '여유' 대신 '고생'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남은 삶을 '유지하는 삶'이 아닌 '경험하는 삶'으로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쇠퇴해 가는 육체의 한계를 확인하고, 편안함에 느슨해진 마음의 고삐를 죄고 싶었다.

열악숙소.jpg 볼리비아 고산사막의 열악한 숙소: 히말라야 로지와 키르기스스탄 알틴아라샨 산장을 능가하는 불편함

3. 땀과 불편함 뒤에 마주한 찰나의 경이

남미의 역사와 문화를 대면하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대자연의 심장부로 들어가 땀 흘리며 걷는 시간은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다.

걷기피츠로이.jpg 피츠로이 트래킹로드. 남미 곳곳을 걸으며 원시의 속살을 체험.

와이나픽추의 '죽음의 계단'을 네 발로 기어오르며 마주한 마추픽추의 전경은 패키지 여행객이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했다. 해발 5,000m의 레인보우 마운틴에서는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저산소증 앞에 겸손을 배웠고, 티티카카 호수의 '태양의 섬'에서는 벽돌 대여섯 개를 넣은 듯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도 수채화 같은 풍경에 넋을 잃었다.

와아니피추.jpg 저 멀리 마추픽추와 진입로가 보이는 와이나 피추 정상부근. 산의 경사가 아찔하다.
레인보우마운틴.jpg 레인보우 마운틴 5000미터 정상에서 본 신비한 모습

볼리비아의 챠르키니와 콘도리리 빙하 트레킹은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마침내 도착한 빙하에서 깨물어 먹은 얼음 한 조각은 그 모든 피로를 씻어내는 마법의 묘약이었다.

차카르니빙하호.jpg 챠르키니 빙하와 빙하호수. 5100미터 고도. 걷는 길은 순하나 숨이 턱턱 막힌다.

4. 다른 행성을 걷는 듯한 비현실의 연속

우유니 소금평원 끝자락, 바닥에 모래가 깔린 소금 호스텔에서의 하룻밤은 생경한 경험이었다. 이어지는 트누파 화산 트레킹에서 내려다본 소금평원은 마치 눈 덮인 평지처럼 보였다. 칠레 국경으로 향하는 500km의 길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같았다.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흙빛인데 평지는 눈이 온 듯 하얗고, 붉은 호수 위로 붉은 플라밍고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영화 <주라기 공원> 속 익룡의 비행처럼 환상적이었다.

붉은염호.jpg 볼리비아 소금호수 중 가장 특이한 붉은 호수: 플라밍고 서식지

이후 마주한 파타고니아는 '지구 마지막 야생'이라는 수식어답게 장엄한 요새 같았다. 빙하가 깎아낸 피오르 지형과 서릿발 같은 설산, 그 아래 보석처럼 시린 쪽빛 호수는 스코틀랜드의 황량함을 넘어선 태초의 풍경이었다.

파타고니아아름다움.jpg 파타고니아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정경

토레스 델 파이네의 0도 추위 속 텐트 취침은 안나푸르나와 알틴 아라샨에서의 떨림을 소환했다. 일출을 보겠다고 헤드랜턴에 의지해 새벽길을 오르던 만용 덕에 며칠을 절뚝거렸지만, 세 개의 화강암 기둥(삼봉)이라는 거대한 제단 앞에 서니 고생은 눈 녹듯 사라졌다.

델파이네.jpg 토레스델파이네 정상의 3봉. 3봉 아래에 빙하호수가 있음.

파타고니아의 상징, 피츠로이로 가는 길은 또 어떠했나. 빙하가 만든 계곡 사이로 실핏줄처럼 엉켜 흐르는 개천과 낮은 덤불 평원, 그 끝에 등대처럼 서 있는 피츠로이는 비현실의 극치였다. 하늘을 떠받치는 신전의 기둥 같은 봉우리 앞에서 나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수만 년을 버텨온 그 기둥들에 비하면 나의 고단함은 찰나의 바람에 불과했다.

피츠로이2인물.jpg 피츠로이산이 가장 멋지게 보이는 트래킹 쉼터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바다를 향해 멈춰 서 있는 마르티알 산의 빙하를 끝으로 나의 트레킹 여정은 마침표를 찍었다.

우수아이아.jpg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도시 뒤편 산에 빙하공원이 있음

5. 길 위에서 배운 '여행자의 운'

여행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LA에서의 결항은 동생과의 뜻밖의 재회를 선물했고, 리마의 비상사태와 볼리비아의 대통령 선거 폭동은 긴박한 타이밍 속에 천운으로 피해 갔다. 국경 폐쇄와 외교부의 경고 문자를 뒤로하고 태양의 섬으로 '대피'했던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도 짜릿한 추억이다.

대양의섬식탁.jpg 볼리비아 티티카카호수 내의 태양의 섬에 있는 잉카 제단.

55일간 면도를 하지 않았다. 노숙자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은 소매치기를 방지하는 의외의 효과가 있었으나, 호텔 경비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귀국 전날, 애지중지 기른 수염을 깎아내며 면도날이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이과수 수염.jpg 이과수 폭포 전망대에서 브라질 학생들과 함께: 흰 수염을 한 동양인이 행운을 준다고 학생들이 몰려옴.

이제 나는 이 강렬했던 55일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한다. 이 고생스러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신발 끈을 조이는 동기가 되길 바라며, 국가별 세부 여행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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