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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Aug 20. 2019

꼰대의 추억

농경사회 꼰대와 정보화 사회 꼰대

꼰대 참 푸근한 단어이다. 70년대 초 고교시절 우리는 선생님과 아버지를 꼰대라 칭했다. 존칭을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친구들끼리 편하게 얘기할 때는 모두 꼰대였다. 좋은 선생님 좋은 아버지는 그냥 선생님, 아버지이고 잔소리 많이 하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선생님과 아버지가 꼰대였다. 친구에게 “00야 오늘 너희 집에서 놀자”라고 하면 “안돼 우리 꼰대 집에 있어” “니 꼰대는 맨날 집에 있냐?” 뭐 이런 식이 었다. 


선생님의 경우에는 좋은 분은 그냥 선생님으로 호칭했고 꼬장꼬장한 분은 꼰대라고 했으며 사이코 같은 분은 꼰대도 아닌 험악한 별명으로 불렀다. 모든 학생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버님, 선생님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쓰는 모범생도 있었다. 


꼰대가 꼭 아버지와 선생님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우리에게 잔소리하는 아저씨도 꼰대라고 불렀다. 요즈음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모르는 척 하지만 과거에는 어른들이 “학생 놈들이 공부는 안 하고” 하면서 호통을 쳤다. 우리에게 잔소리하고 불편하게 하는 모든 어른은 꼰대였다.


4천 년 전 중국의 갑골문자와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에도 요즘 젊은이들 버르장머리 없다는 의미의 글이 있다고 한다(내가 확인한 바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가 들면 젊은이들이 뭔가 미숙해 보여서 “우리 때는 이랬는데 요즘 애들은”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게 된다. 반면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의 다양한 종류의 잔소리에 불편해하며 꼰대 등의 단어로 응수한다. 꼰대는 5천년전부터 있어왔다는 의미이다.


60, 70년대 농경사회에서는 잔소리할 사람이 아버지, 동네 어른,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꼰대였다. 당시 꼰대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삼강오륜을 강조했으며 특히 장유유서를 많이 강조하셨다. 심할 경우 공자님과 맹자님도 등장했다. 직장에서도 잔소리 많이 하는 꼰대는 있었으나 당시 살벌한 사회에서 조인트 까고 집어던지는 또라이가 많아 꼰대는 별 존재감이 없었다. 결재판 집어던지는 또라이에 비해 잔소리만 하는 꼰대는 푸근한 형님이었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가 되다 보니 꼰대의 범주가 넓어진 것 같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서로 연결되니 도처에 잔소리꾼이 포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천 년대 들어서며 조인트 까고 집어던지는 또라이가 사라지자 드디어 잔소리꾼인 꼰대의 존재감이 높아진듯하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대학병원에서는 얼마전 까지도레지던트 조인트 까는 또라이 교수가 있었다는데 그 분들이 이제는 잔소리로 대신하는 꼰대로 변했을 것이다.


요즘 직장마다 꼰대가 넘쳐난다고 아우성들이다. 당연한 일이다. 조인트 까는 또라이들이 죄다 꼰대로 전향하여 기존 꼰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70년대생이 꼰대 소리를 많이 듣는 것 같다. 회사마다 허리 역할을 하고 있을 터이니 잔소리를 많이 할 위치일 것이다. 꼰대 소리 듣는 것에 모두들 민감해하던데 그럴 필요 없다. 회사의 허리급 위로 올라가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꼰대가 된다고 생각해라. 뭐랄까 사춘기 지나면 콧수염 나는 것과 비슷하다. 남들 수염 날 때 혼자 수염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꼰대 안되려고 기 쓰지 마라. 당신을 꼰대라고 부르는 후배도 조금 있으면 콧수염 난다. 후배가 콧수염 난 후 당신에게 저 사람은 콧수염도 없냐고 한심하게 쳐다볼 것이다. 


나에게 잔소리하고 불편하게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 꼰대이다. 내가 불편하게 느껴야 꼰대이다. 옆사람이 아무리 꼰대라고 열을 올려도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 내게는 꼰대가 아니다. 지금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도 모두에게 꼰대는 아닐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는 당사자에게 꼰대일 뿐이다. 남들은 괜찮은데 나만 불편함을 느낀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요즘 젊은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이 말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린 사람이 있다면 내가 왜 불편한지 잘 살펴야 한다. 나의 생각이 고루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젊은이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이다. 내가 꼰대인 것이다.


60대인 내 친구들도 술 한잔 할 때면 “우리 때는 이랬는데 요즘 젊은애들은” 하면서 뒷담화 한다. 젊은이들로 인해 별 스트레스받지 않는 60대들도 이럴진대 상사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야 꼰대 뒷담화 하면서 낄낄거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농담도 하고 뒷담화도 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삶의 방식이 무익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트레스 해소에 좋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브런치 글 읽다 보니 많은 젊은이들이 꼰대 뒷담화 하면서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젊은 작가는 직장상사가 꼰대인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분석해놨던데 분석 필요 없다 그냥 불편하면 다 꼰대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나만 불편함을 느껴 모든 윗사람이 정말 꼰대처럼 보인다면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매사 부정적인 사람이 잘 풀리는 것 못 봤다.


꼰대 뒷담화 하던 내가 꼰대가 되었고 나를 꼰대라고 뒷담화 하던 70년대생이 지금 주류 꼰대라고 한다. 70년대생을 꼰대라고 뒷담화 하는 당신도 곧 누군가의 꼰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꼰대라고 뒷담화 하는 젊은이를 보며 “요즘 젊은것들은” 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 돌고 돈다.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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