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종합무용선물세트 Tanz im August

by 집나온 여자

창백한 얼굴에 빨간 립스틱, 찢어질 것 같은 하얀 몸뚱이가 한 발자국씩 하히힐을 내딛습니다. 그의 체중이 옮겨질 때마다, 얼굴에 헐겁게 걸어놓은 가느다란 액세서리와 팬티에 달린 구슬이 출렁입니다. 어디 어디 영화에 그것도 공포영화에서나 봤음직한, 겨울 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주아주 낡은 성에서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대마왕처럼 보입니다.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카운트테너 같은 목소리로 온몸을 떨며 구슬프게 노래를 합니다. 언캐니함의 극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쫘악 돋고 나서야 우려가 시작됩니다. ‘지구 저 쪽 동방의 끝, 그것도 꽤 보수적인 나라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내 정서에 너무 힘든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후회가 스치는 찰나,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엽기적이기까지 한 퍼포먼스 속에서 관객들은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꽤나 적극적입니다. ‘다들 그냥 오버하면서 반응만 과장되게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팔뚝에서 약간의 피를 뽑아내 경매에 부칩니다. 아니 웬 걸. 이 사람들, 실제로 경매에 참여합니다. 1유로, 2유로, 3유로… 작가가 부추기자 30유로에 낙찰됩니다. 낙찰자는 망설임 없이 돈을 내고 피를 건네받습니다. 끔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부 관객들에게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피일뿐이야.”
더불어 유머도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로 가득 찼어. 내 몸은 유로로 가득 찼고.”

Ivo Dimchev의 Lili Handel, 베를린 국제 무용 퍼포먼스 페스티벌 Tanz im August의 한 작품이었습니다.


좌: Ivo Dimchev의 Lili Handel ©Tamas Katko / 우: Halle Tanzbühne Berlin은 19세기 체육관 내벽과 바닥을 그대로 유지.
좌: Halle Tanzbühne Berlin / 중, 우: 공연 후, 극장에 머물며 여운을 나누는 관객들
좌: HAU는 HAU1 중심에 HAU2·3이 더해진 3관 체제 극장 / 우: 전후 지어진 현대극장 Haus der Berliner Festspiele

매년 8월 개최되는 Tanz im August는 8월의 종합무용선물세트와도 같습니다. 종합과자세트처럼 모든 게 내 취향은 아니지만, 참 다양하게 모여 있어 이것저것 맛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류와 비주류 공연이 같은 무대에 오르고, 19세기(1880년대) 지어진 옛 펌프장 건물을 리노베이션 한 Radialsystem부터, 체육관으로 지어진 건물을 경찰서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현대무용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Halle Tanzbühne Berlin까지 극장의 성격도 다채롭습니다.
나는 학생할인으로 70유로에 7개의 공연을 선택할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고, 매일매일 공연을 보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극장투어를 했습니다. 늘 다니던 길이였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구석구석에서 극장들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아주 쏠쏠했습니다.
이 페스티벌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공연을 보고 토론하며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공연장 한 편의 바(Bar)에 남아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물론 장소를 옮기기 귀찮아서 그 자리에 남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공연의 여운을 함께 나누는 듯했습니다. 공연장에 남아있으면 종종 무료로 나눠주는 와인을 마실 수도 있고 작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생기곤 했습니다.
이곳 관객들은 꽤 솔직합니다.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저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어느 날은 소극장 공연 중 조용히 한 명, 두 명, 결국 스무 명 가까운 관객이 빠져나갔습니다. 공연 후, 나와 동행한 친구와 안면이 있던 무용수가 우리 자리로 와서 왜 그랬던 것 갔냐며 초면인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후기를 직접 듣고 갔습니다.
베를린에는 무용에 관심 없는 이조차 한 번쯤은 들어봤을 샤샤발츠와 친구들(Sasha Waltz & Guests)이라는 국제적인 댄스컴퍼니가 있습니다. 지인들이 샤샤발츠 공연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흔하게 하곤 하는데, 이곳에선 무용이 고상한 취미나 전공자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의 문화인 듯합니다.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있듯, 좋아하는 무용가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습니다. 내가 자동차에 관심 없듯이, 무용에 관심 없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으면 열광하고, 싫으면 박차고 나오는’ 솔직한 관객들의 존재야말로 ‘문화도시 베를린’을 만든 진짜 힘 아닐까요. 정교한 문화정책이나 사회적 배경보다,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소비하고 참여하는 이들의 태도가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그런 얄팍하지만 그럴듯한 추측을, 공연장을 나서며 슬쩍해봅니다.




(이 글은 2008년에 작성된 것으로, 현재의 상황과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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