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천국, 베를린

예술의 난장 한복판에서

by 집나온 여자

베를린은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많습니다. 개똥도 흔합니다. 하지만 쓰레기가 넘쳐나는 건 거리뿐만이 아닙니다. 도시 전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갤러리 속에도 ‘쓰레기 같은’ 예술들이 가득합니다.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 정부는 사람들이 모두 서베를린으로 떠나 텅 비게 된 동베를린 일부 지역을 갤러리 거리로 조성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처음에는 로젠탈러 플라츠(Rosenthaler Platz) 인근, 아우구스트슈트라세(Auguststraße)에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브루넨슈트라세(Brunnenstraße)까지 영역이 확장되었습니다. 이제는 특정 골목만 지목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시 전역에 갤러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런 작은 갤러리들은 대체로 상업적 목적이 없습니다. 상업성이 있다 해도,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도무지 돈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수많은 작품들 중 실제로 팔릴 만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어쩌면 이는 제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오만일지도 모르지만요. 어쨌든, 많은 갤러리는 숨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려는 기획자들의 열정과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됩니다.

갤러리가 많은 만큼 예술의 방향도 다양합니다. 어떤 곳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래피티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어떤 곳은 기획안만 가진 신인 작가들의 지원서를 받아 작품 제작부터 전시까지 도와주기도 합니다. 돈이 없어도, 인지도가 없어도 예술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이곳에는 있습니다.


보통 매월 첫째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는 많은 갤러리에서 새로운 전시의 오프닝(Vernissage)이 열립니다. 어떤 곳은 맥주나 와인을 저렴하게 팔고, 어떤 곳은 아예 무료로 제공합니다. 생각보다 술과 스낵을 무료로 내놓는 곳이 많다 보니, 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날짜를 맞춰 오프닝이 열리는 갤러리를 찾아다니며 공짜 술을 즐깁니다. 여러 갤러리가 동시에 오픈식을 여는 주말이면, 술집 대신 갤러리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합니다.

전시 마지막 날 열리는 작은 마무리 파티(Finissage)에서도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갤러리 안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낯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렇게 전시도 보고, 술도 마시고, 사람도 사귀게 되는 일석삼조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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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M Gallery Florian Heinke의 개인전 오픈식. 무료로 제공되는 맥주가 들어있는 냉장고, 벌써 3/4이 비어버렸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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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lyst Projektraum | Tatjana Fell Galerie 미디어 아티스트인 Viriana Alcalde(사진:좌)의 개인전 마우리 파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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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lyst Projektraum | Tatjana Fell Galerie 갤러리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08


쓰레기가 많다는 것은 곧 기회가 많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기회가 많다는 건 작품을 규정하는 하나의 잣대가 없다는 의미이고, 그렇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경력이나 국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쓰레기 같은’ 작품조차 거리낌 없이 전시되고, 가끔은 그 속에서 진짜 보석 같은 예술이 튀어나옵니다.

쓰레기 같은 예술은 고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을 뿐입니다. 맥주병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가치 있게 바꾸는 정신을 예술에도 이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벼룩시장이나 작은 갤러리에서 쓰레기 더미 속 보물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게 바로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재미 아닐까요?

쓰레기 천국, 베를린입니다.



(이 글은 2008년에 작성된 것으로, 현재의 상황과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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