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사람과 행복
찰나에 마주친 그 사람 생각으로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하루속에서 난 이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며칠 째, 의아할 정도로 수다스럽다. 사나흘이면 그 사람의 형체가 흐려질 줄 알았는데, 스쳤던 그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져 내 눈동자 안에서 움직였다.
나의 비밀을 많이 아는 언니와 통화 중이다. 일주일간 홀로 여기 저기 여행하는 동안에도 뭘 먹는지, 어디서 자는지, 누굴 만나는지, 다음 행선지 등 시시콜콜 하나도 빠짐없이 소식을 나누었다.
"어땠어? 이번 여행도 잘 다녀왔어?"
"응. 언니. 그게... 그 사람 얼굴을 마주한게 5분도 안될텐데...... 자꾸 생각이 나네."
" 활력소가 될거야. 당분간은! 설렘!! 몰라? 그게 아니면 설레임이나 사먹어!
너의 그 돌덩이 같은 심장이 쿵했구나. 좋다~ 으흐흐."
언니는 무조건 나의 편이다. 다시 스윽 그곳을 가보란다. 뭘 망설여!
" 아니야. 언니. 이건 내 여행 시나리오가 아니었어요. 맞아. 이런 건 아니야. 정신 차려야 해."
" 시나리오는 늘 수정되는 것이야. 고정되는 것은 없어. 너도 변하잖아? 이렇게."
나는 말이 없다. 그 사람 키는? 나이는? 눈가 주름은? 팔자 주름은? 마음 속 그림자를 눈치 챈 언니는 나를 깔깔 웃게 하고 말았다.
" 잠시 마주했던 게 다인데... 나보다 좀 큰 것 같고, 나이 몰라. 명함 속 이름만 알 뿐. 아무것도 몰라. 인상은 환했어."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쩜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모를 일이다. 간사한 사람의 마음.
나의 마음이 낯설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기운을 기억한다. 따뜻하고... 가볍게 날리듯, 그렇지 않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이를 질색하는 내게 그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네겐 지금 따뜻한 기운이 맴도는 사람이 필요해. 그 느낌 맞을거야."
이렇게 나는 그 사람과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언니와 대신 나누며 그 공허함과 그리움을 달래고 달래었다. 시시각각 내 마음대로 부풀어오르는 마음이 통제가 안되면 언니를 귀찮게 했다.
여행의 끝은 늘 내게 일상으로 돌아갈 충분한 힘을 주었고, 여행은 기억이 아닌 추억이 되어 나의 고단한, 때로는 무거운 24시간을 말없이 짊어지고 가게 한다.
마음에 잔뜩 먹구름이 끼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를 해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찰나에 마주친 그 사람은 내게 뛰는 심장과, 두근거림을 더해주어 눈을 뜬 아침부터 눈을 감아야 하는 밤까지 파도 위 요트를 타는 듯한 착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혼자서만 그리워하는 사람. 이게 이런 거였을까. 수많은 감정의 요람 위에서 나는 숨죽였다 흔들렸다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설렘과 두근거림은 조금씩 슬픔과 우울함이 섞여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실 시간이다. 오후 2시. 진하게 마시고 일 시작해야한다. 담담해져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그리워도 먹고 살아야 할 생계가 위협당하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에게는.
손잡이를 잡고 그 사람을 떠올리며 원두를 갈지만 이내 멈추고 만다.
메세지 창을 열었다. 벌써 2주가 흘렀구나. 그 사람과 주고 받은 그 날의 메세지 뒤로 서로 아무 말이 없다.
공백이다. 그 사이 그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그 사람의 얼굴이다.
몇 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저에요. 기억하나요? 메세지를 썼다. 그리고 전송을 누르지 못했다. 썼던 한 줄은 지워버리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용기가 없다. 손님이었고, 여전히 손님이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당신을 잠시 그렇게 스친 후, 자면서도 당신을 생각했어요. " 라고 말한다면.
무섭다. 감정을 빼고 이성으로 생각하니 지구 백바퀴를 돌아도 말이 안된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원두를 간다. 원두의 향은 그대로인데 싫증이 나려고 한다. 다행히도 원두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참에 다른 걸로 바꿔야겠다. 원두 주문을 해야겠다 싶다. 기회이다. 그래. 난 손님이다. 손님이라는 아주 멋진 핑계가 있으니 그와 연락할 수 있는 합당한 기회가 내게 있는 것이다.
몇 시간을 연습했다. 사심이 가득 들어간 그 사람에게 단지 객관적인 손님으로서 원두 주문을 하는 말을 연습했다.
웃기기 그지 없다. 연습을 해야 한다니. 혹시라도 생각과 다른 말이 먼저 튀어나갈까봐 이미 내가 아닌 나를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대화 창을 열고, 조심스럽게 키 버튼을 눌러 의도하지 않은 척, 철저하게 의도된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명백한 이유가 있으니 이 연기가 껄끄럽진 않다.
" 사장님. 안녕하세요. 지금은 많이 바쁘실 것 같구요. 시간 날 때 답장 부탁 드려요. "
답이 올때까지 내 심장은 비정상적인 뜀박질을 하느라 호되게 고생을 했다. 한시간 반 뒤 알람이 울렸다. 전화기를 던져두고 딴 청을 피우는 그 시간의 기다림은 내게 가혹하게 못할 짓이었다.
그에게 좋아하는 원두의 향과 성질을 얘기하며 드립 할 때 맛의 차이가 나는 문제를 말했다. 나는 손님이고 그는 카페 주인장이니 가능했다. 주문할 원두의 종류는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먼저 나왔다.
"커피 내리는 방법을 한번 알려드릴게요. 오시기 전에 연락 한 번 해주세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거 아니지? 이 사람이 커피 내리는 걸 알려준다고? 연락을 달라니!! 소리내서 읽었다.
이 손님은 그에 대한 사심이 홍수가 되어 넘쳐버렸다. 카페 사장, 그 사람은 당신을 스친 한 여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친절함을 보여준다.
이 사람의 호의를 놓칠 수 가 없다. 하지만 당장 달려갈 수 없으니.
날짜를 정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정했다. 31일. 그러나 바로 말하지 않았다. 일정 확인을 하고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그렇게 다시 메세지를 할 빌미를 남긴 채 원두 주문을 하며 그와의 메세지 대화가 끝나갈 무렵 그때서야 호흡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런 여우 같은 면이 있구나, 나에게도 사람을 찾는 마음이 있구나. 놀랄 따름이다.
원두를 주문하기 위해 그에게 말을 걸었던 나의 시작은 그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마음 속 날짜를 보니 앞으로 2주 가량 남았다.
딱 한 달 만에 그를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싶어 이 먼 길을 떠난다니. 마음은 구름이 되어 이미 무지개를 건넜고, 지옥에서 해매던 이전의 나는 온데 간데 없고 천국에서 날고 있는 듯 하다.
며칠 후 주문한 원두가 하루 늦게 도착했다. 택배사 문제가 있어 하루 늦게 발송했다며 그로부터 톡이 왔다. 이런 경우, 택배 문제는 고맙기만 하다. 그가 연락을 먼저 하게 만들었으니.
말을 이었다. 하루 늦은 건 괜찮다고, 2주 후 월요일날 갈 것 같은데 시간이 괜찮은지 물었다.
"괜찮습니다."
31일 월요일 아침이다. 카페는 10시 오픈.
그는 이른 월요일 아침, 7시 43분. 열시에 문을 열지만 그 전에 와도 된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마음이야 빨리 달려가서 당신 얼굴을 보고 싶지만, 10시에 맞춰 가겠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이미 내 마음은 당신을 보러 벌써 수십번을 갔다왔기에 이제 남은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룸미러 속 내 표정을 확인하고, 하얀 꽃무늬 원피스를 탁탁 털며 차에서 내렸다.
한걸음 한걸음. 카페의 커다란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니 내 눈 정면에 그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서 있다. 체크 무늬 셔츠에 가벼운 면바지 차림의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몇 몇 직원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와 지금 이 순간은 의도된 마주침이다.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처음에 봤던, 처음에 느꼈던 그것이 그대로이다
오셨어요!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 사람은 내게 드립 커피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직접 원두 및 커피잔, 드리퍼를 비롯해 하나씩 준비중이었다. 직원들이 나를 알아본다. 어머! 오셨어요~! 그는 내게 아침을 먹었냐고 물으며 직원에게 호박 타르트 하나를 준비해달라고 한다.
의도된 만남.
그러나 지금 당신과 마주하게 될 앞으로의 시간은 예측이 안된다. 심장이 다시 뛰고 얼굴이 상기되는 듯 하다. 등을 돌렸다. 전시 된 원두 샘플을 구경하며 딴 청이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는 지금 그 앞에 있다.
그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