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HAN Feb 28. 2022

이 주의 시들-건성

대충대충 해. ...만사를 그렇게 하진 말고.

안녕하십니까, 제이한입니다. 건성을 주제로 한 이주의 베스트 시간이네요.

이번 주제는 건성이었습니다. 건성에는 일을 대충 한다는 뜻인 건성이 있고, 쉽게 마르는 성질을 뜻하는 건성이 있습니다. 저는 첫번째를 염두에 두고 주제를 정했는데 두번째 뜻으로 글을 쓰신 분들도 꽤 계시더군요. 의도치 않게 중의적인 단어가 된 한 주였습니다.

뜻이 상이하니 글의 개성도 천차만별로 나누어졌습니다. '어떤 경향이 있다'고 뭉뚱그려서 표현하기보단 그냥 직접 하나하나 살펴보는 편이 더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그럼 이번 주 베스트에 오른 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1.에펨은처음인데님의 '건성인 하루'

https://m.fmkorea.com/4341080188
////////////////////

하루는 온종일 건성이었다

크림색 하늘이 유화빛으로 도는 그런 하루는 이제 사라졌다

무엇을 위해 인간은 이 땅에 박인 채 서 있나

빙그르르 회전하며 날라가는 수분기를 적막한 태양이 삼킨다

곧게 흐르지 않는 눈물, 지구가 자전하는 탓

억지스런 춤을 지구와 함께 추지만

가끔 대기 밖으로 나가 추락하고 싶을 때 있다

그때 흐르는 눈물은 유독 태양이 뜨겁다

무감각의 하루, 유영하는 존재, 그리하여 덧없어지는 사랑

//////////////
시평: 정서가 메마른 사람의 하루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건성입니다. 부드러운 바람과 푸르른 하늘, 풍요로운 저녁놀은 설령 있다 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죠.

그런 건성을 그나마 달래 줄 수 있는 눈물은 나오자마자 곡선으로 휘어지고, 태양빛에 타들어가 버립니다. 까슬거리는 사포에 눈이 비벼지는 듯한 고통.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단풍잎처럼 모든 감각들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모든 게 말라버려 고통까지 잊은 사람의 말로죠.

잘 읽었습니다.


2. 대전광역시서구님의 '건성으로 쓴 시'

https://m.fmkorea.com/4354094091
//////////////

그러게, 대강 몇 줄 끄적거려보다가 안되면 그만인 것을

왜 되도 않는 거장 흉내를 내보겠다고 그랬을까


되면 되는대로 써내려가는 것이 시였던 것을

처음엔 큰 기대도 안했던 것을

왜 물 한 바가지로 샘을 채우려 했을까


쩍쩍 갈라진 우물 바닥을 

박박 긁으면

돌아오는 것은 겨우 흙먼지인데


내일은 손에 로션을 듬뿍 바르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러야겠다

/////////////
시평: 창작욕은 완성되기 전에는 결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발상은 본인밖에 알 수가 없으니까요. 남들이 인식을 못하는 상태이니, 창작욕이란 건 사실 진정성조차 불투명한 개념이죠.

화자가 펜을 들지 않는 이유가 달리 있는 걸까요. 하지만 있어봤자입니다. 이런 핑계는 몇개든 마음 내키는대로 갖다붙일 수가 있거든요. 충분히 정리를 한 다음에 쓴다? 나는 구상을 완벽하게 해야 글이 써지는 타입이다? 남이 들으면 웃겨죽을 소리지요.

미리 물을 뿌려두고 진득하게 땅을 파는 사람이랑 가끔씩 깔짝깔짝 삽만 드는 사람. 과연 어느 쪽이 더 깊이 파게 될까요.

다행히도 화자는 핑계를 거두고 옳은 길을 찾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3. 신현빈님의 '유언'

https://m.fmkorea.com/4339813162
/////////////////

짙은 구름이 달빛을 가린 봄 밤

창가에 스미는 아련한 불빛만이

방 한편, 고뇌 속에 죽어가는

한 가닥의 연화(煙火),

몸부림의 형상,

내 생존의 신호탄


만일, 미완의 투고로

내 영혼의 자유와

무한의 고해 사라진다면

여기, 아직 죽지 못한 시인 한 명

이 시 한 편으로 피어오르리라

//////////////
시평: 대부분의 죽음은 육체가 정신에게 행하는 타의적인 건성입니다. 난 이제 내 심장박동을 대충 할테니 정신 너도 같이 해이해져라. 그리고 육체는 정신이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삶의 불을 꺼트리기 시작하죠.

그러면 홀로 남은 정신은 어떻게 될까요. 더군다나 그것이 육체가 떠난 걸 알아챌 틈도 없는 사람의 정신이라면?

창작의 고통이 결과물을 항상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골몰해하면 골몰할수록 정신을 깊게 옭아매는 늪과 같은 감옥. 그런 사람은 죽어도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든지, 그게 아니면 정신이 다 소진되든지. 이 시의 화자는 어떤 끝을 맞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

이번 주 베스트는 참 멘트를 달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주 보이는 분들이 쓰신 글들도 여태까지 봤던 작품과는 이질적인 시세계가 느껴졌거든요. 여러분들과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던 알찬 일주일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좋은 작품들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작가의 이전글 이 주의 시들-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