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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쓰기

지금이다

유언장 쓰기          

유언장을 쓰기에 적당한 때가 있다면, 그것은 지금이다. 물질적인 유산 상속에 대한 것만 유언장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유산으로 남겨줄 만큼 재산이 없다. 자식도 아들 하나뿐이라 나눠 줄 사람도 없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유언장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뇌출혈로 쓰러져서 6년간 누워만 있다가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나에게는 항상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아버지셨다. 엄마가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바쁠 때 그 빈자리를 대신해 주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대화할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엄마도 치매가 시작한 지 5년쯤 지났다. 아직 나를 알아보긴 하지만 몸이 좋지 않으면 삶도 헷갈리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요양원의 어느 할머니는 재산이 많지만, 자식들이 잘 찾아오지 않아 매일 창밖을 바라보며 지내신다.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 할아버지는 매일 점심때면 딸이 와서 식사를 챙겨드리고, 저녁이면 아들이 낡은 차를 끌고 와서 저녁을 수발하고 산책시켜드리고 간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가족이다.     

자식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란 돈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부모님이 편하게 사시고도 재산을 남겨 준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나의 유언장을 써야 할 때이다. 유언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사후 처리를 부탁하는 것과 나에게 쓰는 것, 두 가지로 나눈다. 아들이 다 커서 혼자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다. 재산을 남겨 줄 수 없는 대신 함께했던 좋은 추억밖에 남겨 줄 것이 없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길이 유산이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과 둘이 여행을 간다. 길어야 이삼일 정도의 주말여행이지만 온종일 얘기할 수 있으니 좋다. 

내가 살아 온 길을 돌아보면 뭐가 남았을까. 기쁨도 많고 상처도 많다. 성공한 것이 없어도 열심히 살았으니 되었다. 물려줄 것이 없어도 사랑하니 되었다. 남에게 보여주는 인생이 아니라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것이 나의 유산이다.      

오늘 밤엔 조용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나의 첫 번째 유언장을 써야겠다.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나에게도 수고 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 외에 더할 말이 있을까. 몇 번이나 고쳐 쓸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해마다 연말이면 새해 계획과 함께 유언장을 수정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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