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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뒤에 보내 드립니다

오늘 말하자

일 년 뒤에 보내 드립니다          

  얼마 전 제주 여행을 갔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 여행은 못 가고 국내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으로 일주일간 떠나서 있기로 했다. 시월의 억새밭을 보기 위해서이다. 가을 제주의 오름은 억새로 뒤덮인다. 바람에 날리는 억새를 보고 있으면 물멍, 불멍이 아니라 억새멍이 된다. 아니 바람멍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잠시 일행과 헤어져서 혼자 놀 시간이 생겼다. 뭘 할까 하다가 평소에 좋아하는 세화 해변으로 나갔다. 세화 주변에 새로 생긴 작은 문구점 구경도 하고 제주 기념품을 파는 가게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카페 창문에 “일 년 뒤에 보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도 항상 나에게 엽서를 보냈던 나는 그 문구에 끌려 카페로 들어갔다. 세화 해변을 찍은 사진과 그림엽서들이 있었다. 한쪽 벽에는 1월부터 12월까지 원하는 날짜에 엽서를 넣을 수 있는 선반이 있다. 엽서를 쓰고 원하는 날짜 칸에 넣으면 내년 그 날짜에 맞춰서 보내주는 것이란다. 

  항상 그렇듯이 내 것 한 장, 아들 앞으로 한 장을 골랐다. 내년 아들 생일에 맞춰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애정 표현도 잘 못 하는 무뚝뚝한 성격이라 글이라도 잘 써보자 싶어서 정성껏 엽서를 쓰고 내년 4월 아들 생일에 맞춰 도착하게 날짜를 찾아서 넣었다. 값비싼 물건이 아니지만 좋은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한 장을 썼다. 그것도 내 생일에 맞춰 도착하도록. 앞으로 일 년을 넘게 기다려야 올 테니 아마 엽서를 썼던 사실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살아서 받을 수는 있겠지.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일, 혹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면 꼭 나오는 대답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미루고 미루다가 죽기 전에 후회로 남는 걸까. 우리에게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에 치야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미룬다. 꼭 그런 걸 말도 해야 아나 싶은 똥고집으로 미룬다. 생각은 하지만 쑥스러워서 민망해서 말 못하고 미룬다. 말하기 힘들면 편지나 카드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누구나 내일이라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사느라 바빠서 잊어버리고 산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갑자기 사고로 죽거나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다시 깨닫는다. 아, 지금 잘 살아야지. 그러나 도 다음날이면 잊고 산다. 


  급하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미루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 미루지 말고 오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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