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메뉴는 죽음입니
엄마가 돌아가신지 몇 달이나 지났을까 싶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나고 첫 번째 기일이 지났다. 해가 바뀌고도 우울 모드에 젖어 있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살자 마음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가 사시던 집도 정리하고 상속세 신고도하고 복잡한 행정처리를 다 끝내는 데도 일년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가니 어느 날 문득 ’아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아빠를 만나셨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생에도 아빠와 함께 하겠다는 분이셨으니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겠지.
아니타 무르자니가 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책은 저자가 직접 겪은 임사체험을 그대로 쓴 것이다. 림프암 말기로 의식 불명 상태에서 중환자실에서 의학적으로 사망선고가 내려진다. 그러자 아니타는 고통이 사라지고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주변에 슬퍼하고 있는 가족들도 보이고 곁에는 먼저 떠난 아버지도 함께 있다. 살아계실 때는 인도 관습대로 살기를 원해서 딸에게 남들처럼 결혼하고 평법하게 살기를 강요했던 아버지였지만 죽음 뒤에 만난 아버지는 그냥 존재 그래도 인정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아니타가 다시 깨어나보니 암이 사라지고 여러 가지 증상도 없어져서 병원서 퇴원하게 된다. 아니타는 깨어나고 나서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아니타가 본 것처럼 엄마도 아빠를, 그리고 막내 동생을 만났을 것이다,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자 훨씬 마음이 평온해진다. 먼저 떠난 가족들이 함께 잘 지내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조금 편안해진 마음을 잡고 다시 원고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2022년 여름 초고를 거의 완성하고도 일년 동안 마무리 하지 못했다. 엄마 장례식 이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충분한 애도를 했던 것일까. 일 년 정도면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벗어나는 걸까.
상실과 애도는 아마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누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에 따라 애도의 기간도 정도도 다르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는 1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쉽고 보고 싶다. 동생은 16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 충격과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자살 생존자의 죄책감은 평생 지우기 힘들다. 반면 엄마는 아흔 셋까지 집에서 지내시다가 노환으로 떠나셨으니 고통스러운 자책을 덜하다. 이제 원고를 마무리하며 나의 애도도 일단계를 끝내고 싶다. 잘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아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고. 비슷한 사연들을 스치기만 해도 울컥하는 증상은 평생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나답게 사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자.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았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