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껑브흐공원과 비엔나슈타트파크에서만끽한 공원의 가치
유럽에 살면서 한국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한국보다 어떤 게 좋은지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런저런 경험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나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준 도시공원들이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왕궁의 정원을 시민에게 개방하거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공원부지를 넉넉하게 확보하는 방식으로 공원을 가꾸어왔다.
나는 지금까지 유럽의 많은 도시공원들을 방문하고 산책했다. 그런 과정에서 공원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럽의 도시공원은 크게 4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규모와 역사로 압도하는 거대 공원. 파리의 불로뉴 숲과 런던의 하이드파크가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먹을거리 볼거리 가득한 휴식공간. 브뤼셀의 껑브흐 공원과 암스테르담의 폰델파크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문화예술과 전시공간으로 빛나는 도시공원. 비엔나의 슈타트파크와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이 손꼽힌다. 네 번째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숨은 보석 같은 공원. 베른의 로즈가든과 로마의 보르게세 공원이 그러하다.
특히 이 중에서 껑브흐 공원과 슈타트파크는 내가 브뤼셀과 비엔나에 거주하면서 자주 산책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숲과 나무, 호수와 잔디밭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공원이려니 짐작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연 속 힐링을 만끽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향기와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의 모든 나무와 꽃들은 제 자리에 서 있는 이유와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공원이 나에게 선사한 경이로운 풍경과 힐링의 추억을 이제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2년 넘게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는 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다. 도시마다 특유의 문화와 경관을 뽐내고 있었지만, 공통된 사실은 도시 한복판에 울창한 시민공원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민들이 아무리 자연을 좋아하고 공원을 사랑해도 효율성과 경제성이 우선되는 문화에서는 도시공원의 존재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유럽 국가들이 시민들의 소중한 쉼터로 도시공원을 가꾸어왔던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근대 산업발전을 주도해왔지만,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성장과 복지, 자연과의 조화라는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승자독식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모색 속에서 이른바 '유러피언 드림'이 탄생한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책 제목이기도 한 '유러피언 드림'은 물질 만능주의와 성공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공동체 의식과 문화적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자기 계발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복지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둔다. 사치스러운 과소비는 힘들지만, 소박한 취미활동이나 자연 속 힐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유럽에서 도시공원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브뤼셀에 머물던 1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껑브흐 공원의 호숫가 산책길을 달렸다. 워낙 호수가 넓어서 한 바퀴를 완주하면 20분 정도 걸렸다. 오른쪽 왼쪽, 방향을 바꿔서 총 4번을 돌고 나면 온 몸에 땀이 배었다. 산책길 여기저기에 보이는 개똥을 피해서 달리다 보면 장애물 넘기 경주를 하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엄청난 크기의 대형견들을 줄에 묶지도 않고 산책하는 게 이곳 사람들의 익숙한 문화였다.
껑브흐 공원은 아침 달리기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주말에 맛있는 스페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기쁨도 함께 주었다. 1인당 1유로를 내고 호숫가에서 뗏목 같은 왕복선을 타면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섬 선착장에 도착한다. 로빈슨 섬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잔디언덕과 썬베드 그리고 나무로 지어진 멋진 레스토랑이 있다.
이 레스토랑이 자랑하는 음식은 '오늘의 스페셜 점심'이다. 저렴한 가격에 셰프의 손맛이 가미된 유럽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다. 나는 송어 갈릭 버터구이와 양고기 립이 특히 맛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뭉게구름 가득한 하늘과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노라면 세상에 그 어떤 진수성찬도 이보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껑브흐 공원을 회상하면, 아침마다 달리던 호숫가 산책길과 미각을 충족시킨 스페셜 요리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나는 지금 비엔나 북동쪽에 위치한 카그란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다. 도심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이고 우반(지하철)을 타고 대여섯 역만 지나면 시내에 도착한다. 비엔나의 매력은 전통과 현대, 종교와 예술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과 호프부르그 왕궁,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을 배경으로 세계적인 명품숍들이 즐비해 있는 케른트너 거리와 콜마르크트 거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 화려한 도심에서 20분 정도 동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비엔나를 대표하는 공원, 슈타트파크를 만나게 된다. 1862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비엔나 시민들을 위해 만든 슈타트파크는 유럽의 도시공원들이 지닌 특징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먼저 공통점은 공원 중심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호수와 아름드리 고목들 그리고 드넓은 잔디밭이다. 호숫가 전망 좋은 벤치에 앉아 물길을 여유 있게 가르는 고니와 청둥오리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일상의 번잡스러움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함께 슈타트파크에서만 찾을 수 있는 매력은 공원 곳곳에 자리 잡은 조각상들이다. 비엔나를 대표하는, 더 나아가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에 활약했던 예술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세기 왈츠의 황제라 불렸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금상을 비롯하여, 예술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와 후기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교향곡 대가 안톤 부르크너의 조각상이 세월의 더깨를 앉은 채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19세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역사화가이자 장식 예술가였던 한스 마카르트의 동상을 발견하는 재미도 빠트릴 수 없다.
사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으로 대표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들은 친숙하고 반복적인 음률로 구성된 무도회용 작품이다. 따라서 음악사적으로 베토벤이나 쇼팽 등 당대를 풍미한 천재 음악가들에 비해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 어떠랴. 비엔나 시민들은 여전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슈타트파크의 구석구석을 품위 있게 장식한 조각상의 주인공들이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닌 문화예술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각상에 이름만 있을 뿐 인물에 대한 아무런 부가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보고 각자의 관점에서 평가하라는 의도가 아닐까?
슈타트파크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공원 바로 근처에 지하철 역과 트램,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빈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연이어 벤치를 설치해 놓아서 산책하다가 앉고 싶으면 언제든 벤치에서 편하게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접근성이 뛰어나고 시민들을 배려하는 도시공원이 의외로 드물다. 겉보기에는 번지르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막상 공원을 둘러보면 관리자 마인드로 딱딱하게 운영되고 있는 도시공원들에 비해 슈타트파크가 지닌 이와 같은 편의성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고층빌딩과 도로, 아파트와 주택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공원은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이 자연 속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 아름드리 울창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잔잔한 호수와 잔디 언덕이 구색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걸음을 내딛으며 자연을 음미하고, 때로는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특히 햇볕이 따사로운 계절에 유럽의 도시공원은 일광욕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나무와 드넓은 잔디, 거대한 호수를 갖춘 공원은 시민들의 안식처를 뛰어넘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런던 시민뿐만 아니라 런던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누구나 하이드파크를 산책하던 추억을 공유한다. 뉴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센트럴파크도 마찬가지다. 세계 유명 도시들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은 최첨단 고층건물과 야경으로 빛나는 스카이라인과 함께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된 도심 속 공원이 아닐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서울에 살면서 즐겨가던 공원은 어린이대공원이나 과천 서울대공원 같은 인공미 가득한 놀이공원이었다. 어쩌다 발견하는 도시공원들은 빈약한 공터와 벤치가 있는, 부실하고 허접한 장소였다. 시민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이기도 한 도심 속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을 상상하기란 힘들었다. 현재는 신도시를 중심으로 대형공원들이 조성되어 있지만, 정작 서울을 상징하는 도시공원은 여전히 부재하다. 부산, 광주, 인천 등 지역을 대표한 도시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청계천이 복원되고 양재천 산책로가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듯이, 조만간 용산에 서울을 대표하는 도시공원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지역 도시들에서도 시민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자신만의 콘셉트를 갖춘 구성. 둘째, 시민의 입장에서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시설. 셋째, 자연과 조화를 이룬 친환경 관리.
앞서 유럽의 주요 도시공원들을 주제와 특징에 따라 분류했듯이, 우리의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운 공원은 자신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공원을 설계하고 조성하는 작업은 원예학, 조경학, 건축학, 생명과학, 문화예술학 등이 모두 합쳐진 멀티 플랜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하여 창조하는 종합예술이다.
단지 공유지에 나무와 잔디, 적당한 크기의 호수와 벤치를 구비해 놓으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시공원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계륵에 불과하다. 도시공원 일몰제 시행에 맞춰 관련 예산 미확보를 빌미로 공원부지의 상업적 재개발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도시공원은 상상하는 그 이상의 혜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활력 넘친 스포츠 아레나를 선사한다. 생태학적 교육장소이며 미세먼지에 맞서 청정 필터의 역할을 수행한다.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 관광과 요식업을 활성화한다. 무엇보다 바쁜 일상에 지친 시민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행복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지금부터라도 비엔나의 슈타트파크를 비롯하여 세계 유명 도시공원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관리되어 왔는지, 시민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잘 관찰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유럽의 도시공원들처럼 랜드마크가 될 만한 공원이 만들어지고 시민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에게 그 이상의 기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