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작가 / 9일 차 ~ (끝)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9일 차 ~끝>
# 순대와 혁명
순대를 좋아했다.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분식집 같은 곳에서 순대를 덮어두었던 비닐이 열릴 때 훅 끼쳐 나오는 김을 보는 일도 좋아했다. 올라오는 김이 적으면 조금 전 누가 순대를 사갔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고 김이 풍성하게 오르면 순대를 사간 사람이 한동안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p174
# 죽음과 유서
어쩌면 유서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넘어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것이므로.(p.183)
<단상>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 친구 손에 이끌려 어딘가에 들어갔다. 비닐처럼 보이는 것에 잡채 같은 것이 둘둘 말린, 거무스름한 것을 먹자고 했다. 환하게 웃는 친구 앞에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것은 먹어보기도 전에 좋아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시켜 놓은 것을, 어쩌지 못해 먹어 주는 척했다. 그 도도함은 평소 나답지 않았고 친구의 친절은 해맑았다. ‘어라, 맛있네’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왜 이리 성큼성큼 입안으로 순대가 들어가던지, 먹다가 무안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대문 문화촌 언덕바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순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팔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두 여자아이는 순대를 놓고 친해졌다. 그 친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순대는 기억에 또렷하다.
이렇게 필사와 단상을 쓰면서 나의 모습이 또렷해진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쳐 읽던 단어들이 나의 숨겨진 감정들을 파헤친다. 미처 몰랐거나 못 본 척 회피했던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타인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 누구도 측은하지 않을 수 없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대출해서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두고, 결국 책을 구입했다. 이사마다 책은 가장 골칫거리가 되어, 책을 더 이상 구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었는데, 또 그 결심이 무너진다.
하지만 읽는 즐거움, 쓸 수 있는 행복은 분명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