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셜 / 김신지 에세이
<단상>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세모(歲暮)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 데에 이바지한다. - 죽란시사첩서 -
시 모임답게 모임의 규약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시다. 모임 날짜를 정하는 데에 이보다 낭만적인 방법이 있을까. 철에 따라 꽃이 피고 과일이 영그는 시간에 맞추어 벗들을 만난다니. 이제 나는 눈앞의 계절을 볼 때 200여 년 전의 다산은 지금쯤 무엇을 기다렸을까 하고 시간을 겹쳐보는 사람이 되었다.
꽃을 남달리 사랑했던 다산은 집 마당에 살구나무,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치자나무, 벽오동, 금잔화, 국화 등 온갖 풀과 나무를 가꾸었는데, 혹시라도 오가는 사람들의 옷자락에 스쳐 꽃이 다칠까 싶어 화단 둘레에 대나무 울타리, 죽란을 쳐놓았다고 한다. 마음 맞는 벗들과 다산의 집에 자주 모였으므로 모임의 이름은 자연스레 ‘죽란시사’가 되었다. 풍류를 즐기는 데 누구보다 섬세하고 창의적인 다산이었기에 생각해 낼 수 있었던 모임이 아닐까 싶다. p50
청소엔 여전히 큰 맘을 먹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창문을 열면 반절은 해낸 기분이 든다. 적당히 포근하고 적당히 쌀쌀한 봄바람이 청소 세포를 깨우기라도 하는 걸까. 활짝 열어둔 창으로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고 묵은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분주한 먼지를 일으키고 싶어진다.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동물이 개울을 찾듯, 겨우내 웅크리고 있었던 집을 씻겨줄 시간이다.
그렇다면 봄 청소는 집의 기지개라 해야 할까. 경칩은 봄이 왔음을 알고 깨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기지개를 켜는 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깨어나는 풀과 나무와 개구리처럼. 나의 봄 기지개는 내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책상 위에 읽지도 않을 거면서 쌓아둔 책들을 책장으로 옮기고, 이것저것 늘어놓아 너저분해진 거실 곳곳의 물건들을 제자리에 넣는다. 꼼꼼히 청소기를 돌리고, 먼저 청소만 해오던 마룻바닥에 모처럼 물걸레 청소도 한다. 욕실 타일틈으로 그새 번지기 시작한 물때도 닦아낸다. 오래 방치하면 마음도 물때가 앉은 것처럼 미끈거리는데 이상한 일이지, 바깥의 물때를 뽀득뽀득 닦아내다 보면 손 닿지 않는 마음의 물때도 지워지는 기분이다.
청소는 결국 빈자리를 만드는 일. 매년 이맘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듯 바닥을 쓸고 닦고, 화분을 옮기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나눈다.
봄에게 앉을자리를 내어주어야지. p55
<단상>
누군가를 맞이할 때면 나는 창문을 열고 현관문까지 활짝 열어둔 채 청소를 한다. 혹여나 묵은 냄새가 있으면 바람에 실려 보내고, 오시는 분들에게 나의 상냥한 환영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봄을 맞이하는 일도 이와 같다. 화분의 흙을 어루만져 촉촉하게 다독이고, 추위에 떨던 잎사귀에 따스함도 건네며 나도 계절의 문을 연다. 꽃피는 봄을 기다리다,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시 모임을 했다는 다산이 부러웠다. 삶이 그야말로 시(詩)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시는 단순한 풍류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자 했다니 아름다운 사람이었음을 짐작한다.
그러나 정작 이번 봄, 나는 기쁘게 마중할 친구 한 명을 잃었다. 늘 두 팔 벌려 "나의 베프!"라며 환하게 맞이해 주던 친구는, 몸 안의 병을 안고 무심히 떠났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딸을 돌봐야 했었다. 우리는 살구꽃이 피어도, 벚꽃 향이 흩날려도 편히 마주 앉지 못했다. 제주도 수국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그녀는 이 봄날 속절없이 가버렸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들은 내가 몰랐던 그녀를 들려주었다. 여고 시절엔 책을 사랑하던 문학소녀였고, 대학 시절엔 늘 수석을 놓치지 않던 명석한 인재였다고. 나는 그녀의 글도, 그녀의 학문적 열정도 모른 채, 그저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그녀만 바라보았다.
진작에 글을 나누었더라면, 함께 봄의 문장을 읊었더라면 우리는 더 깊은 동지일 수 있었을까.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아쉬움이 며칠째 책상 위에 놓인 장례식 식순지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