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베리아 횡단열차 2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로망이 되는 이유는 일상과 떨어져 온전히 나와 마주하는 시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만을 가지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막상 그러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먹어야 하고 씻어야 하고 자야 하는 우리의 일상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우 한정된 공간에서 먹고 씻고 자는 또 다른 공간에서의 생존 게임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횡단열차를 타고 설국열차를 만들었는지 2등석칸을 지나 식당칸을 가니 나도 모르게 "우아~~" 하는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칸에서만큼은 생존이 아닌 여행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우아하게 이국의 음식을 즐겨 볼 수 있다. 일단 말이 안통하지만 이것 저것 현지음식을 주문하기로 한다. 빨간 건 보르쉬라고 그냥 비트국물이고 오렌지 색은 그 비싸다는 철갑상어알 캐비어인데 맛은 비렸고 그냥 감자버섯 볶음이 젤 맛있었다. 횡단열차안에서의 또 다른 여행 코스가 된 셈이다. 그래도 며칠 있었다고 3등석이 편안한 내 집같다. 우리는 정차할 때 나가서 사온 현지 빵과 한국에서부터 조달한 우리의 든든한 식량, 컵밥으로 성대한 파티를 2차로 했다. 이 역시 소소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열차내 시간은 생각보다 꽤 빨리 지나간다. 이르쿠츠크까지 머리를 한 번이라도 감을 거라 생각하고 조그만 세수대야도 준비했건만 사실 필요없다. 이르쿠츠크까지 안 감아도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생각했던 만큼 떡지거나 힘들지 않았고 모스크바 일정이라면 이르쿠츠크쯤 와서 샤워실을 한 번 사용하면 충분할 듯 하다. 이런 여행에서 깔끔을 떨기는 현실적으로 좀 힘들다.
중간 중간 정차역에서 사람들이 계속 타고 내린다. 어느 한 남자는 이틀 넘게 맞은 편 윗칸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야말로 잠만 잔다.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안위를 살피게 되고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내리는 역이 되니 승무원이 와서 이 사람을 깨우고 이 사람은 재빨리 내린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자, 잠만 자고 싶은 자, 여기가 딱이네 하는 생각도 들다가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이렇게 시간은 금새 흘러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바이칼 호수를 끼고 돌면 이르쿠츠크 도착이다. 드디어 4일만에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