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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Kids Oct 15. 2023

다정했던 그때의 가을날

영화 <가을날의 동화> (秋天的童話, 1987)


1. 잔잔한 일상에서 피어오른 사랑

 남자친구인 ‘빈센트’(진백강 분)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제니퍼’(종초홍 분)는 먼 친척인 ‘샘’(주윤발 분)의 도움으로 같은 건물에 살게 된다. 그러나 빈센트의 외도를 알게 된 제니퍼는 좌절하고, 더욱 의기소침해진 채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샘은 그런 제니퍼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연고라곤 없는 제니퍼가 타향살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는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유학 생활이지만 활기차고 당당한 샘 곁에서 제니퍼는 점차 자신감을 얻는다. 


 샘과 제니퍼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둘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점차 성장해나간다. 술과 도박을 즐겨하고 이곳저곳 빚진 것도 많아 가난한 샘은 제니퍼를 사랑하게 되며 그녀와 어울리는 멋진 사람이 되어 정착하고자 하고, 제니퍼는 샘의 조력으로 진취적인 사람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게 된다. 같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둘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고, 두 사람이 그리는 삶 또한 같지 않았다. 샘과 제니퍼는 사랑하는 사람 덕분에 꿈을 꾸었으나 꿈의 끝에 서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긋난 상황 속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별의 순간, 샘은 제니퍼에게 시곗줄을 남기고, 제니퍼는 샘에게 시계알을 남긴다. 다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져 스쳐 지나간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처음부터 이별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감정을 추억과 사랑이 공유된 손목시계를 나눠가지며 비로소 서로에 대한 진심을 알게 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라던 꿈을 이룬 두 사람은 각자의 꿈을 이야기했던 해변에서 훗날 우연히 재회한다. 사람도 넘치고 땅도 넘치는 머나먼 타국에서 연락할 길 하나 없음에도 두 사람이 재회할 수 있었던 건 시계로 이어진 진심 때문이 아닐까. 샘과 제니퍼는 이별하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꿈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마침내 그들의 꿈은 해변에서 재회한 후에야 비로소 방점이 찍혔다. 마침내 제 짝을 찾은 시곗줄과 시계알처럼, 진심이 통하면 아무리 여정이 힘들고 고난할지라도 돌고 돌아 인연이다. 


2. 도시와 이민자


 휘황찬란한 뉴욕 밤거리를 걷는 제니퍼의 시선 속에는 눈부시게 작열하는 전광판과 그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넘친다. 제니퍼가 어렵게 구한 아르바이트를 하러 지친 몸을 이끌어 겨우 올라탄 버스는 마치 해가 지지 않은 듯 밝기만한 뉴욕 거리 한 가운데를 가르며 나아가지만 이 속에 섞이긴 커녕 바다 위를 떠다니는 부표 마냥 소외되어 있다. 그들에겐 그저 타국 사람으로만 치부되는 견고한 다수의 사회에 샘과 제니퍼로 대표되는 소수자들은 부푼 꿈을 안고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보려 하지만 그저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을날의 동화>는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 샘과 제니퍼의 심리적 가교가 되어주는 브루클린 다리, 파티를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처럼 그 장소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점차 겨울이 다가와 쌀쌀해져 가는 가을이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홍콩, 뉴욕을 불문하고 어떤 장소든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우리네와 비슷하기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소소한 행복을 안긴다. 그러나 마냥 평화롭기만 한 사람들의 일상을 배경으로 샘과 제니퍼가 등장할 때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지만, 찬란한 80년대의 뉴욕 속을 부유하는 샘과 제니퍼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초라해져 쓸쓸하다. 


 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와 이민자는 결코 쉽게 동화될 수 없고 그렇기에 씁쓸하고 허전하다. 이민자는 치열하게 발버둥치며 살아가나 아무리 열심히 그들 속에 섞여 일원으로 살아간다 한들,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싸늘한 눈초리와 이들이 처한 부정한 처우는 여전할 뿐이다. 그러나 막막한 현실에 한계를 느끼고 포기하고 싶어도, 생전 처음으로 발을 디딘 도시가 두려워 도망치고 싶어도, 샘과 제니퍼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믿어주는 존재가 있기에 고독과 배척을 이겨내어 또 하루를 살아내고 버텨낼 수 있다. 이민자, 누군가에겐 불청객일 뿐인 이들은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좌절하고 소외되지만, 사랑이 있기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고 일어선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사랑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샘과 제니퍼의 모습 덕분에, <가을날의 동화>는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Written by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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