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세상에는 우연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누군가는 찾아올 사랑, 기회, 운 같은 것을 ‘우연처럼’ 믿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필연이 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그것을 토대로 영화화하는 모습을 피할 수 없다면, 인연이란 것의 존재 유무에 대해 한 번쯤 달콤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진가신 감독의 1996년작 <첨밀밀>은 인연, 그리고 필연에 관한 영화다. 1986년 3월 1일, 홍콩에 돈을 벌러 온 소군(여명)이 이교(장만옥)를 만나 살아가는 홍콩에서의 삶 이야기이자 돌고 돌아 결국 서로의 삶을 채우게 되는 이야기다. 스토리 기반으로 보면, 사실상 고향에 있는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소군과 그런 소군을 알면서도 친구 사이라며 위안 삼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이교의 이야기다. 사실, 둘 다 비겁한 캐릭터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볼 때는 언제나 지극히 캐릭터 중심으로만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를 홍콩의 역사로 보는 시선도 있다. 중국 본토에서 벗어나 홍콩으로 상경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청년 소군은 ‘중국’을 의미하고, 광둥어를 사용하며 이미 서양의 자본주의 문물을 많이 접해본 이교를 ‘홍콩’에, 그들이 계속해서 엇갈리는 부분은 중국에 속해지길 두려워하는 홍콩인의 심리를, 그리고 등려군의 죽음은 비로소 식민지 조약이 끝났다는 것을, 두 사람의 재회는 홍콩의 ‘반환’으로 보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된 홍콩, 그리고 다시 반환돼 중국으로 속해지는 역사의 비유는 이 시기 홍콩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이 홍콩 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일어난 일들이 결국 홍콩의 역사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이 배경으로 흘러가면서,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더욱 돋보인다.
중국에는 “인연이라면 천 리 먼 길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인연이라는 끈이 얼마나 질기길래 엄청나게 넓은 중국에서 저런 말이 다 있을까. 인연을 바탕으로 한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 둘은 결국 만나게 된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해피엔딩이지만, 나는 그 사이에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소군을 따라 올라와선 상처 받은 소정이 그러했으며, 도망자 신세가 돼 뉴욕 길거리에서 죽은 이교의 남편이 그러하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비 오는 항구에서 오랜 시간 이교를 기다린 소군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하다.
그렇기에 우연과 인연, 필연이란 것이 얼마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앞서 첫 문장에 언급한 구절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카메라>의 한 문장이다. 길 위에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제거하지도, 다시 덮어놓을 수도 없는 단단한 필연으로 우리 삶이 구성된다는 말이다. 나는 인연을 믿나?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인연을 믿는가? 믿는다면, 앞으로 어떤 만남을 인연이라 칭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인연은 필연이 될 것인가?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는 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는 영화, <첨밀밀>이다.
Written by 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