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미마셍과 애국심
-여행자 거리 시리즈: 방콕 카오산 로드 3
카오산 로드에 위치해 있는 숙소는 시끄럽다. 시끌벅적한 소리 때문에 새벽 두 세시까지 잠을 설 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래서 이번엔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쏘이 람부뜨리가 딱이었다. 람부뜨리는 카오산처럼 북적거리지 않지만 마사지 숍, 식당, 카페 등이 숙소 가까이에 있어 빈둥거리며 지내기에 딱 좋은 곳이다. 게다가 람부뜨리에는 저렴한 숙소가 즐비하다. 대개 1층은 오픈되어 있는 식당이었고, 2층부터 숙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제일 조용해 보이는 숙소를 골라 체크인을 했다.
그런데 밤이 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1층 식당이 갑자기 영화관으로 바뀐 것이다. 무슨 액션 영화인지 ‘꽝, 윽, 꽥, 퍽, 쿵’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람부뜨리의 싸구려 숙소가 방음시설을 제대로 갖추었을 리 없다. 밤 11가 넘었는데도 1층 영화관은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참다못한 나는 이불을 박 차고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가 봤다. 1층에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 여행자들은 거의 없었다.
12시쯤 되자, 드디어 ‘꽝, 윽 꽥, 퍽, 쿵’ 소리가 멈췄다. 이제야 잠을 잘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와아~~~~”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유럽 축구 중계방송 소리였다. 축구 중계방송 소리에 비하면 영화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축구 경기의 흐름에 따라 비명과 탄식, 환호성이 번갈아가며 터져 나왔다. 하긴, 카오산에서 12시 이전에 잠을 자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지. 축구 중계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체크아웃을 했다. 운하 건너 타논 쌈쎈으로 피난을 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이 더운 날씨에 카오산로드를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쏘이 람부뜨리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쏘이 람브뜨리 골목 끝에 위치해 있는 홍익여행사를 지나 좁은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봤다. 요즘은 스마트 폰으로 금방 숙소 정보를 알아볼 수 있지만, 그때는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좁은 골목에는 싸고 허름한 숙소가 몇 군데 있었다. 체크인을 하기 전에 난 얼른 1층에 텔레비전이 있는지부터 살펴봤다. 다행히 텔레비전은 안 보였다.
“여기라면 조용히 쉴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해서 잡은 방이 바로 문제의 301호였다. 301호는 3층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방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대박 사건이 일어났다. 저녁 6시쯤, 맥주를 사기 위해 잠깐 편의점으로 나왔다. 편의점이 숙소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문을 잠그지 않고 나왔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301호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앗, 이게 뭐지? 지금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금발미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지 뭔가! 금발미녀는 젤리처럼 탄력 있는 몸매의 소유자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엉덩이 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자칫 치한으로 몰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천만 다행히 그녀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바람에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문을 닫고, 금발 미녀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사과를 했다.
“쓰미마셍~~~”
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람부뜨리 골목 입구에 있는 환전소 앞까지 뛰어나왔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환전소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홀짝이며 찬찬히 복기를 해 봤다.
‘왜 내 방에 금발 미녀가 알몸으로 있는 걸까?’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실수였다. 그 숙소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두 군데 있었다. 내가 묵고 있던 301호는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방이었고, 금발 미녀의 방은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방이었던 것이다. 첫날이라 계단이 왼쪽,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왜 ‘죄송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쓰미마셍’이라고 했을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내 입에서는 쓰미마셍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것도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 긴박한 순간에도 뛰어난 재치를 발휘하여 대한민국 여행자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다 털어놓자. 그 후에도 난 여러 번 “쓰미마셍”을 애용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사르나트’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최초로 설법을 행한 곳으로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다. 그 마을에는 ‘디메크 스투파’라고 하는 탑이 있는데 높이가 43미터이고, 기단의 직경이 36미터나 되는 큰 탑이다.
내가 샤르나트를 방문했을 때는 오후 3시쯤이었는데 날씨가 꽤 더웠다. 탑을 대충 훑어보고, 길게 드리워진 탑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독이 몰려왔다. 난 피곤하면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이다. 마침 탑 주변에는 잔디가 잘 깔려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누워 자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져서 살짝 눈을 떠봤다.
오체투지를 아시는지? 오체투지란 부처님께 온전히 나를 맡긴다는 의미의 인사법으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뻗으며 배를 땅에 깔고 다리를 쭉 편 후 머리를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사법 중에 이처럼 경건한 인사법이 또 있을까?
그런데 내가 누워 있는 자리 바로 옆에서 수 십 명의 티베트인들이 탑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탑 앞에는 수 십 개의 촛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과일 등 여러가지 공물이 놓여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과 제단 사이에 벌러덩 들어 누워 있는 파렴치한이 된 것이다.
솔직히 그 티베트인들도 그렇지. 날 깨우고 오체투지를 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는 나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나는 졸지에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벌에 쏘인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소지품을 허겁지겁 챙겼다. 그리고 도망치듯 물러나며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쓰미마셍~~~ 쓰미마셍~~~”
그 후에도 여행을 하다 몇 번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쓰미마셍’이라고 사과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 여행자들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행동으로 인해 일본인 여행자들의 이미지는 아주 조금이겠지만, 훼손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내가 불유쾌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조국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일본어를 꽤 자주 무단으로 도용해 왔다.
이 자리를 빌려 진짜 일본인 여행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혼또 쓰미마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