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증명서 그리고 마사지
-여행자 거리 시리즈: 방콕 카오산 로드 4
카오산 로드에는 가짜 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노점상이 여러 군데 있다. 가짜 운전면허증, 가짜 하버드 대학 학위 증명서, 가짜 FBI 신분증까지 별별 가짜 증명서를 만들어 주는데, 그중에서 가짜 국제 학생증과 기자증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언젠가 나도 딱 한번 가짜 국제 학생증을 만들기 위해 줄을 선 적이 있다. 당시 국제 학생증은 유럽 여행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박물관 입장료를 살 때 국제 학생증을 제출하면 요금을 깎아 주곤 했던 것이다. 가짜 학생증을 만들고 싶다고 하자 업자는 대뜸 ‘1, 2, 3, 4, 5’라고 숫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거기에다 순서대로 이름, 성, 여권 번호, 국적, 생년월일을 적으란다. 작업이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기에 계약금으로 50밧 정도를 지불하고, 1시간 정도 카오산을 어슬렁거리다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지 뭔가. 주문이 너무 많이 밀려 있으니 일단 줄을 서서 기다리라나 뭐라나.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줄을 썼다. ‘그냥 처음부터 줄을 서 있을 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둘리 만화에 나오는 마이콜처럼 생긴 미국인이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비행기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러는데, 양보 좀 해 줄 수 없어?”
“몇 시 비행기인데?”
“얼마 안 남았어. 제발~~~”
마이콜은 태국인처럼 양손을 합장을 한 채, 몇 번이고 부탁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도 딱하다는 듯 마이콜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흔쾌히 양보했다. 마이콜은 그 자리에서 학위 증명서를 만들었다.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가짜 학위 증명서를 만드는 데는 불과 5분도 채 안 걸렸던 것 같다. 잠시 후, 마이콜은 가짜 학위 증명서를 손에 든 채 부랴부랴 카오산을 떠났다. 도대체 가짜 학위 증명서를 어디에 쓰려는 걸까?
그날 저녁이었다. 난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을 먹자마자 마사지 숍을 찾았다. 카오산에서는 1일 1마 시지가 기본이니까. 내가 찾은 곳은 거리에 의자만 내놓고 마사지 영업을 하는 허름한 가게였다. 요즘은 카오산 마사지 업소들이 담합을 했는지, 어디를 가나 요금이 다 똑같다. 하지만 예전에는 가격이 가게마다 달라서 가성비가 좋은 마사지 숍은 늘 손님들로 붐볐다.
난 1시간짜리 전신 마사지를 신청한 뒤 반쯤 수면 상태로 누워 있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마사지사가 내 몸을 오른쪽으로 빙그르 돌렸다. 그런데 아 글쎄! 내 옆에 낮에 만났던 마이콜이 마사지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흥!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더니만....’
공교롭게도 그때 옆에 있던 마사지사가 마이콜의 몸을 왼쪽으로 빙그르 돌리는 바람에 우리는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마이콜이 얼마나 어색한 표정을 짓던지, 내가 다 얼굴이 빨개졌다. 얼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고 했지만, 마사지를 받고 있는 도중이어서 뜻대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마사지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 데 마이콜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일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 이것도 인연인데 맥주 한잔 하지 않을래? 내가 쏠게.”
“좋지.”
마이콜은 가게에서 창(태국 맥주)을 두 개 사 왔다. 우리는 가게 앞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콜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태국의 영어학원에 취직하기 위해 그 가짜 학위증명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마감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다며 엄청 미안해하던 얼굴이 생각난다. 마이콜은 일단 방콕 영어 학원에서 돈을 번 뒤, 당분간 동남아 여행을 계속할 거라고 했다.
솔직히 그때 우리가 또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둘은 후줄근한 반바지와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닳고 닳은 슬리퍼를 신은 채 후덥지근한 카오산로드의 열기를 만끽하며 차가운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또 떠나는 여행자들은 배낭을 메고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고, 노점상들은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의자와 테이블을 길거리로 내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얀 비둘기는 얼마나 넓은 바다를 날아야
모래 위에서 쉴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답은 불어오는 저 바람 속에 있다네."
무작정 배낭을 메고 떠났던 나의 긴 여행은 끝이 났고,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청춘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었다.
마이콜은 좀 더 청춘의 끝을 늘려보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조금은 부러웠다. 하지만 난 이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어른의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바람만이 아는 그 답이 무엇인지 결국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빈 맥주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악수를 하고, 각자의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