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 로드에서 기념품 사기

-여행자 거리 시리즈: 방콕 카오산 로드 5

by 황근기



그동안 수차례 카오산을 들락거렸지만, 기념품을 사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오늘은 마음먹고 기념품을 사기로 했다. 카오산로드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특이한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모든 걸 팝니다. 혹은 모든 걸 삽니다.’


아니, 실은 간판이 아니다. 누런 상자 판때기에다 매직으로 대충 적어 놓은 글씨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 그곳에는 별별 물건이 다 있었다. 의류, 신발, 가방, 전자제품, 액세서리는 기본이고, 시계, 팔찌, 휴대전화, 물병, 양말, 등산 장비, 낡은 책, 액자, 칼, 통조림, 국기 등등 없는 게 없어 보였다. 여행자들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팔고 간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념품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옷가게도 살펴봤다. 대부분의 옷가게에는 코끼리 바지와 유명 인물의 초상화가 프린트되어 있는 티셔츠가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카오산에서는 체 게바라, 마오쩌뚱, 아널드 슈바 제네거, 밥 말리 등의 인물 초상화가 새겨진 티셔츠가 인기를 끌었다. 처음 카오산에 왔을 때 밥 말리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사서 입고 다니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런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에는 조금 어색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자루로 만든 빈티지 가방이나, 깡통으로 만든 저금통, 철로 만든 로봇 등 독특한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노점상이 있어 찬찬히 살펴봤지만, 역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런 독특한 상품은 여행지에서 보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집으로 가지고 가면 어김없이 처치 곤란한 짐이 되어 버린다. 이미 우리 집에는 그런 처치 곤란한 짐들을 넣어 놓은 박스가 몇 개나 있다.


‘역시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을 사야 하나....’


언제부터인가 각 나라의 자석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부피도 안 나가고, 보관하기도 쉬워서 기념품으로 그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자석을 사려고 살펴보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자석 퀄리티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성의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냥 대충 만들다만 느낌이었다.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끙, 결국 또 호랑이 연고나 몇 개 사 가야 하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수민족 복장을 한 토산품 판매원이 다가왔다.

“헬로! 난 태국의 산악 지대에 사는 소수 민족인데. 기념품을 사고 싶어? 그럼 이게 최고야.”

키가 작고 깡마른 아줌마는 네팔인들이 입는 듯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소수 민족이라고 소개한 아줌마는 다짜고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게 건넸다. 그 아줌마의 영어 실력은 유창했다.

“일단 한번 보기만 해. 이거 진짜 올 핸드메이드야. 태국에 왔으면 태국 소수 민족이 직접 만든 물건을 사야 기념이 되는 거라고. 이 가방은 관광지에서 파는 그런 흔한 물건이 아니야. 우리 소수민족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서 짠 물건이라니까. 아! 물론 그래서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해. 하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하지.”


소수민족 아줌마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그래, 태국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물건을 사야 기념이 되지.’

우리는 바로 흥정으로 들어갔다. 흥정을 할 때는 그 물건을 사고 싶다는 기미를 내비쳐서는 안 된다. 그런 기미를 내비치는 순간,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뛸 테니까.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인가. 이미 내 속마음을 눈치챈 소수민족 아줌마는 끝까지 자신이 처음 제시한 금액을 고수했다. 결국 난 꽤 비싼 가격에 그 가방을 사고 말았다. 하지만 원하는 기념품을 샀기에 만족했다. 태국스러움이 풀풀 풍기는, 소수민족이 한 땀 한 땀 따서 만든 올 핸드메이드 가방이 아닌가.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여행지에서는 그렇게 괜찮아 보이던 물건이 왜 집에서는 갑자기 볼품없는 허접 쓰레기로 변하는 걸까? 태국스러움이 물씬 풍기던 올 핸드메이드 가방도 그랬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그냥 평범하고 촌스러운 가방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씁쓸한 심정으로 가방을 살펴보다 우연히 가방 안쪽에 붙어 있는 작은 꼬리표를 발견했다. 그 꼬리표에는 어디서 많이 보던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made in China>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더 황당한 건 그 소수민족 복장을 한 아줌마들도 진짜 소수 민족이 아니란다. 방콕에서 태어나, 평생 방콕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방콕 토박이들이 소수 민족 복장을 하고, 카오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거란다. 하긴, 카오산 로드에서 파는 물건이 진짜일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지.


카오산 로드에는 여행객을 상대로 크고 작은 사기를 치는 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여행자에게 몰래 약을 먹여서 주머니를 터는 사람들도 있고, 거스름돈을 일부로 안 주는 경우도 있고, 친절을 베푸는 척 다가와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다. 카오산에서는 자주 이런 사기꾼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긴, 어느 여행자 거리나 이런 사람들은 꼭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왜 여행 중에 겪은 안 좋은 일마저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겪은 힘들고 짜증 난 일들이 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걸까?


불편하고, 짜증 나고, 실망했던 여행의 그 순간들로 인해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성장했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카오산로드에서 가짜 소수민족 아줌마에게 중국제 가방을 샀던 기억도, 지금은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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