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은 그래도 카오산이다

-여행자 거리 시리즈: 방콕 카오산 로드 6

by 황근기

2006년도에 티베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오산에 들른 적이 있다. 원래는 3박 4일 동안 카오산에서 마사지나 받으며 푹 쉬다가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루도 안 돼서 불쑥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적거리는 카오산의 풍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이쏘이에서 갈비국수로 아침을 때운 뒤, 홍익 여행사에 들러 미리 끊어 놓았던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그날 저녁에 인천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당초 예정보다 3일이나 빨리 귀국하면서 ‘그래,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카오산은 졸업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카오산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카오산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02년도에 ‘버디로지’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버디로지는 에어컨, 수영장 등을 갖춘 고급 숙소였는데, 숙박요금이 당시 다른 숙소들에 비해 10배 정도는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숙소가 카오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다들 그렇게 말했지만, 버디로지는 크게 성공을 거뒀다. 그 후 카오산에는 고급 숙소가 속속 들어섰다.


로컬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작고 소박한 가게들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 자리에는 대신 맥도널드, 스타벅스, KFC 같은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섰다. 많은 여행자들이 “뭐, 카오산에 맥도널드가 생긴다고! 그게 말이 되냐?” 라며 탄식했다. 하지만 카오산도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카오산 입구에 들어선 맥도널드는 오픈하자마자 장사진을 이루었다. 카오산 맥도널드점 지금도 방콕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매장 중 하나이다.


예전에는 노점상에서 파는 벌레 튀김 사진 정도는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 여행자들은 사 먹지도 않을 거면서 노점상 주변을 서성거리며 벌레 튀김 사진을 찍으며 시시덕거리곤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 번은 내가 벌레 튀김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자, 사진을 찍으려면 10밧을 내야만 한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자세히 보니 10밧을 내고 사진을 찍으라는 문구가 벌레 튀김 사이에 꽂혀 있었다.

카오산은 원래 가난한 배낭 여행자들과 히피들로 가득한 거리였다. 그들은 밤만 되면 카오산 거리에 죽치고 앉아서, 지치지도 않고 정말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는 말이지. 좀 더 많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여기서 가장 싼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있어."

"야야, 말도 마! 나는 현지인들보다 더 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오늘 하루를 다 바쳤어."

"어, 그렇구나! 나는 내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좀 거창하게 포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것이 바로 당시 '카오산 로드의 정신'이었다. 카오산의 주인이었던 히피들과 가난한 배낭 여행자들은 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카오산이 점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카오산을 찾는 사람들의 면면도 크게 바뀌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단체 관광객들이 대절한 버스를 타고 카오산을 찾기 시작했다. 거기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태국의 젊은이들과, 코스모폴리턴적인 분위기를 체험하기 위해 카오산을 잠깐 들렀다 가는 관광객들까지 가세하면서부터 카오산은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실망이 컸던 걸까? 그 후 난 몇 년 동안 카오산을 찾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카오산에 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몇 년이 지나자 생각이 또 달라졌다. 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카오산의 풍경이 떠올랐다. 결국 2010년에 인도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스톱 오버로 다시 카오산을 찾았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뻔질나게 카오산을 들락거리고 있다. 도대체 난 왜 카오산 로드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고단하고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지에서의 생활도 일상 못지않게 팍팍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조식을 먹고,

부랴부랴 호텔을 나선다. 이곳저곳 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모처럼 돈과 시간을 들여서 떠나온 여행인데...”라는 생각 때문에 1분 1초가 아깝다. 결국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다 밤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오게 된다. 오히려 일상생활을 할 때보다 여행지에서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여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 것 같다.


카오산에서의 여행 패턴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빈둥빈둥'이다. 아무 때나 일어나 노점상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국수로 때우고, 낮에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피곤하면 마사지를 받고, 이도 저도 만사가 귀찮으면 숙소에서 낮잠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카오산에는 특별히 구경할 거리도 없고, 꼭 가야 할 관광 명소도 없다.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자유롭게 머물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면 된다. 이런 자유로움 때문에 아직도 난 카오산을 들락거리는 게 아닐까.


이제 나는 카오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꽤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괜히 물을 흐리는 게 아닐까, 솔직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눈치를 볼 필요는 없겠지? 이곳은 클럽이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출입이 가능한 여행자 거리니까.


오늘도 카오산은 밤이 되자 특유의 화장을 하고 새로운 여행자들의 맞이 한다. 거리에는 온갖 가짜 상품들이 진열되고, 색색의 전구가 방콕의 미지근하고 엷은 어둠을 조금씩 밀어낸다. 노점상들이 파는 이국적인 음식 냄새에 정신이 팔려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카오산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여행자들은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카오산의 밤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라이브 카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Knockin' On Heaven’s Door' 가수는 오래전에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고, 여행자들은 향수에 젖은 듯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오늘 밤, 오랜만에 카오산 로드의 카페에 앉아 가수의 라이브를 듣고 있으려니, 처음 카오산을 걷던 그 젊고 푸르던 날이 생각난다. 겁 없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던 그 젊은 시절, 카오산은 내게 자유의 공기를 선물해 주었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카오산의 그 공기는 아직 내 혈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수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르는 저 오래된 유행가처럼 카오산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사실 이 거리에 주인이 어디 따로 있을까. 히피든, 배낭 여행자든, 단체 관광객이든, 비즈니스맨이든, 카오산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이 거리의 주인들이지.


앞으로도 카오산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빠르게 변해갈 테고, 또 누군가는 나처럼 '예전의 그 카오산이 아니야.'라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오산은 그래도 카오산이다. 또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낯선 건물이 들어서고, 거리의 풍경이 달라지고, 물가가 오르고, 인심이 점점 각박해져도, 이 거리는 언제나 무겁고 낡은 배낭을 짊어진 젊은 여행자들로 북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몇 번은 더 이 거리를 찾을 것 같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거리를 서성거리던 그 젊은 날의 나를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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