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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환회 Feb 27. 2022

누워서 400년 전 추리

시간의 딸(1951) 조지핀 테이

[세계 추리문학전집] 07/50


범인을 쫓다 맨홀에 빠져 부상을 당하고 입원 중인 그랜트 경위는 천장만 바라보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마치 <현기증>과 <이창>의 제임스 스튜어트를 합친 것 같은 상황인 그는 본업을 살려 역사 속 미스터리를 풀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이어 한 초상화의 얼굴에 홀린 듯 빠져든다. 주인공은 영국 역사상 가장 굵직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리처드 3세다. 악인으로 판명된 그의 초상화는 왜 판사와 같은 위엄을 풍기는 걸까? 다양한 사료를 찾아보던 그랜트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정말 리처드 3세는 두 조카를 죽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황은 리처드 3세가 무고하다고 가리킨다. 그랜트는 미국인 유학생 캐러딘과 의기투합해 이미 굳어진 역사적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이 추리는 다른 어떤 소설의 미스터리와 비교해 봐도 특색있다. 규모가 크다. 400년 전 사건을 파고든다. 오직 논리와 이성에 기대 생각만으로 실체에 다가간다. 환자인 그랜트는 병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조사원' 캐러딘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본문의 표현처럼 '아주 재미있는 지적 경험'을 하게 된다.


제목 『시간의 딸』은 격언 '진리는 시간의 딸'에서 따왔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뜻이다. 책의 주제의식도 이와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실제 그랜트는 '그건 정말 있었던 일인가' 습관처럼 묻고, 경찰로서 '소문이 증거로 채택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진실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역사에는 수많은 왜곡이 이뤄졌다. 편견과 확증 편향 때문이다. 그랜드-캐러딘 콤비는 성역 없이 의심한다. 오직 진실만이 그들의 금과옥조다. 불확실성을 두들기는 과정에서 바위처럼 굳건해 보였던 역사책 속 진리에 서서히 균열이 생긴다.


작가 조지핀 테이의 정갈하고 경제적인 서술이 품격있다. 불필요한 수식을 빼고 오직 논리에 따라 글을 풀어가는 태도는 책의 테마인 진실 우선주의를 닮았다. 역시 미사여구를 최소화하고 냉소 미학이 느껴지는 문체를 사용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가 이 책을 오마주 했음을 쉽게 수긍하게 된다. (『빙과』는 영어 제목이 '시간의 조카딸'이며 과거 사건의 진실을 뒤집어 보는 구성을 지녔다.) 두 책은 모두 추리에서 진실이 가장 중요하며, 그렇지만 진실은 가려지고 왜곡되기 쉽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간극에서 미스터리 읽기의 재미가 발생한다는 사실 또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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