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넌 너보다 늘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먼저인 아이였어. 누가 가르쳐줬다기보다 네 기질이 그랬던 것 같아.
한 날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한가운데 미에로화이바 빈 병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거야. 넌 고민했어. 이걸 어떻게 할까. 이 골목이 하필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자주 다니는 곳이라 누군가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 그런데 막상 이 병을 집까지 들고 갈 용기는 없는 거야. 그래서 길옆으로 치워두자! 결심하고 병을 길가에 놓는데, 넌 마치 네가 쓰레기를 버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어. 죄책감이었지.
그 순간 요구르트 아줌마(프레시 매니저)가 널 지켜보고 계셨던 걸 안 거야. 네가 버린 거라고 오해하시면 어쩌나 당황하고 있는데 그분은 네 우려와 달리 한껏 칭찬해 주셨어. 어린 네가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냐고. 하지만 마음 편히 그 칭찬을 받을 수 없었어. 넌 다 해줘도 더 해주지 못해 스스로 마음의 짐을 쌓는 사람이니까.
있잖아. 타인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널 생각한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보면 그건 또 전혀 아니다? 대가를 바라고 선의를 베푼 건 아니라고 자부했는데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 늘 부정당하는 너라는 사람을.
항상 내 시선은 타인을 쫓아. 계속 눈치 보느라 아등바등해. 그래서 참 속상해. 밖으로 향하는 건 쉬운데 왜 안으로 돌리는 건 이렇게나 어려운 건지. 너 되게 소중한 사람인데 나조차 너를 봐주지 않는 게 미치도록 답답할 때가 많아. 아끼는 물건도 작은 스크래치라도 생기면 더 안타깝게 여기고 어떻게든 고치려고 애쓰는데, 난 널 지우려고만 하니까.
"최대한 화려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었어.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세상 가장 빛나는 사람처럼 살았지. 속에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이렇게라도 숨기고 싶었던 것 같아. 남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산다는 건 너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었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매번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너를 속이고 모두를 속였지. 내 모든 것을 들켜 버린 때도 있었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빛나는 가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돌멩이에 백날 반짝이를 붙여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임을 아는 사람 앞에서는 그 무엇도 아니더라. 그제야 나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하나 둘 내려놓는 법을 배웠어.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다 어떤 말을 건넸는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나에 대해 싫은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나 대신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아도, 외적으로 칭찬받지 않아도, 내 삶은 생각보다 괜찮았던 거야. 그저 네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네 진심을 다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어."
2020년 6월, 스페인 톨레도 여행을 추억하며 쓴 일기야. 45일간 유럽에서 지내는 넌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근사했어. 네가 보기에 나는 내 다짐과 배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 공교롭게도 저 일기마저 타인을 이야기하고 있네. 네가 보석 같은 사람이라고,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라고, 눈에 띄지 않아도 특별한 건 변함없다고 내가 네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었을 텐데. 너에게 꼭 필요한 사람, 진심을 다해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이 나일 수 있었는데. 난 정녕 너를 보지 못하는 걸까.
나 정말 어리석지? 누가 봐도 괜찮은 네가 눈앞에 있는데 그 밖에서 널 찾으려고 한다는 게. 한 가지 고백하자면 넌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당연한 말이 자꾸만 터무니없이 들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타인을 볼 때마다 너를 한 번씩 돌아보려고. 나도 가끔은 문 두드려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어떤 모습이든 좋으니 화답해 주는 네가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