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타인의 삶을 입어보는 기분

by 호텔몽키

저... 집에서는 이런 거 절대 안 입습니다.

샤워하고 나와서, 몸에 물기 대충 닦고, 낡은 티셔츠 하나 꿰어 입는 게 '국룰'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호텔만 오면,

그 하얗고 묵직한 가운에 꼭 손이 가요.

옷장 문을 열면 비닐에 곱게 싸여 있거나, 욕실 문고리에 무심한 듯 걸려있는 그거.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김이 서린 거울을 쓱 닦아낸 뒤,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몸에 그 묵직한 '타월 가운'을 툭, 걸칩니다.


그 특유의 냄새.

집에서 쓰는 섬유 유연제 냄새와는 전혀 다른,

아주 바싹 마르고, 빳빳하고, 살짝 소독약 냄새가 나는 듯한 그 '호텔 냄새'.


소매는 또 왜 이렇게 긴지.

손등을 다 덮어서 한번 접어 올려야 하고,

허리끈은 또 왜 이리 길어서 어설프게 질끈 묶어야 하죠.

솔직히, 거울에 비친 제 모습... 좀 웃겨요.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왜일까요?


가만 생각해 봤어요.

우리가 평소에 입는 옷은... 전부 '역할'이잖아요.

출근할 때 입는 셔츠, 친구 만날 때 입는 맨투맨, 집에서 입는 낡은 티셔츠.

전부 '나'라는 사람의 역할과 연결되어 있죠.


그런데 이 호텔 가운은,

아무 역할도 없어요.

그저 '투숙객'이라는 익명의 존재만 있을 뿐.


이 옷을 입고는,

이메일을 확인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요.

이 옷이 허락하는 유일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어제 시켜 먹은 룸서비스 트레이 옆에서,

이 낯선 가운을 걸치고,

어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창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는 이 순간.


저는 잠시 '나'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드라마 속 '타인의 삶'을 잠시 입어보는 기분이 듭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이 가운은 욕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두고 떠나야 할 '빌린 옷'이지만,

솔직히,

이 하룻밤의 '역할 놀이',

꽤 마음에 듭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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