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밀도

이상형과 대화에 관하여

by 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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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는데, 아끼는 영화 리스트에 '비포 선라이즈'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는 기차에서 처음 만난 남녀 가 우연히 얘기를 시작해서 다음 날 오전까지 하루를 같이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무려 하루 동안 계속해서 대화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하루 종일 이어지는 남주인공 제시와 여주인공 셀린느의 끊임없는 대화가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상미, 대사, 배우들의 연기 모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인데, 그 중에서도 나의 이상형이 나랑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아끼는 데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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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그러지 않겠냐만은 나의 이상형은 정말로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다. 영화처럼 밤새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대화가 잘 통하기 위해서는 우선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하면 좋겠다.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부분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은 그 다름을 -윤리적이나 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대화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 사실 저런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가장 어렵게 다가오곤 한다. 그래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면서 그 와중에 비슷한 점은 많으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에다가 나는 또 모호한 조건을 하나 더 추가시키고야 말았는데, 바로 말의 밀도가 비슷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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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밀도는 말투나 언어의 온도 같은 것보다 더 설명하기 애매한데, 말하자면 대충 이런 것이다. 말을 함에 있어 이 정도는 조금 성글어서 여유 있는 느낌이고, 이 정도는 너무 빽빽해서 부담이고. 이 밀도의 차이로 인해서, 나는 가벼운 말을 여유롭게 툭 내뱉었는데 상대방은 드문드문한 그 말의 사이사이를 빽빽하게 채워서 무겁게 끌어안는 일이 생기곤 한다. 서로의 생각을 언어를 통해서, 특히 말을 통해서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계속해서 오해를 생산해 내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갈등의 시작이 대부분 대화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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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든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라서 실제로는 말의 밀도가 다른 사람을 보다 더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그래도 모든 만남은 발전이라고 -당시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랬기 때문에 내 말의 밀도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상대의 그것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쯤?-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나타난 말의 밀도가 비슷한 사람과 만나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영화같은 일을 슬쩍 바라기도 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 나에게는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는 해도, 밀도가 다른 사람과 다투고 다시 화해하며 오래도록 만나면서 말의 밀도를 맞춰가는 것도 멋있는 일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비포 선라이즈' 같은 이야기보다도 서로 다른 평범한 남녀가 평범하게 만나 말의 밀도를 맞춰가고 평생을 대화하며 산다는 게 더욱 영화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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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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