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양대 타이틀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유럽 랠리가 열렸다.
제12전 중앙유럽 랠리는 지난해 WRC 캘린더에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상 이벤트다. 이는 프랑스 랠리, 독일 랠리가 빠지면서 생긴 타막 랠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단독 개최가 부담스러운 2~3개국이 공동 개최하자는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됐다. 물론 중앙유럽 랠리가 갑작스레 생겨난 이벤트는 아니다. 랠리는 서킷 레이싱과 달리 일반 도로를 통제하며 넓은 지역에서 진행하는 만큼 사전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WRC에서는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할 때 현지 이벤트에 기반하거나 사전 이벤트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검증하고 있다.
중앙유럽 랠리의 경우 3 도시 랠리(3-Städte-Rallye)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비엔나, 헝가리 부다페스트 3개 도시가 중심인 대회로, 1963년 시작하여 반세기에 이르는 긴 역사를 지녔다. 크로아티아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시즌 2번째 타막 랠리(몬테카를로 랠리도 포장 노면이지만, 얼음과 눈길이 뒤섞여 있어 혼합 노면으로 분류된다)인 중앙유럽 랠리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를 오가며 경기를 치렀다.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한 독일 파사우에 랠리 본부를 차리고 프라하에서 개막행사를 열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파사우에서 남서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카르프헴(Karpfham)으로 본부를 옮겼다. 목요일에는 프라하 인근 벨카 츄클레(Velká Chuchle) 슈퍼스페셜 스테이지에서 시작해 금요일에는 하루 종일 체코를 달렸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누볐다. 시상대는 지난해처럼 독일 파사우에 마련됐다.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에서는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눈앞에 둔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포인트 2위로 추격 중인 오트 타낙(Ott Tänak), 그리고 안드레아스 미켈센(Andreas Mikkelsen)을 출격시켰다. 누빌은 이번 경기에서 타낙보다 2점을 더 따낼 경우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하게 된다. 반대로 타낙이 최종전까지 타이틀 가능성을 남겨두기 위해서는 누빌과 30점 안쪽으로 점수 차를 유지해야 한다. 한 경기에서 개인이 딸 수 있는 최고 포인트가 30점(토요일 18점, 슈퍼 선데이 7점, 파워스테이지 5점)이기 때문이다.
미켈센은 개막전인 몬테카를로와 제4전 크로아티아, 제7전 폴란드에 이어 시즌 4번째 출전이다. 스웨덴, 케냐, 라트비아, 핀란드, 칠레에 출전했던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는 이번 시즌 출전이 끝났다. 라피의 코드라이버인 잔느 페름(Janne Ferm)도 WRC에서 떠나기로 했다.
도요타에서는 엘핀 에반스(Elfyn Evans)와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를 필두로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가 다시 포인트 드라이버로 합류했다. 도요타는 팀 내 포인트가 가장 높은 파트타임 드라이버 오지에를 후반기 경기에 모두 출전시키기로 했지만, 칠레 경기를 망치는 바람에 사실상 챔피언 가능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제조사 타이틀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신예 사미 파야리(Sami Pajari)는 4번째 야리스를 운전하며 제조사 포인트는 담당하지 않았다.
M-스포트 포드에서도 3대의 푸마를 준비했다.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와 그레고와 뮌스터(Grégoire Munster)가 포인트를 담당한다. 그리고 그리스 출신의 노장 드라이버 조단 세르데리디스(Jourdan Serderidis)가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빠진 나머지 1대의 푸마 랠리1을 몰고 나왔다.
WRC2에서는 챔피언십 포인트를 등록한 15대 포함 총 20대가 엔트리했다.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피터 솔베르그(Peter Solberg)는 포인트와 상관없이 중앙유럽 랠리에 출전하기로 했다. 12점 뒤처져 있는 요한 로셀(Yohan Rossel)에게는 타이틀 획득을 위한 중요한 일전인 셈이다.
올해 중앙유럽 랠리의 스테이지는 지난해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목요일 체코 프라하에서 개막식을 치른 참가자들은 프라하 남쪽 경마장을 활용한 2.55km의 단거리 스테이지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SS2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클라토비(Klatovy) 서쪽에 마련했지만 레이아웃이 달라졌다.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누빌이 장애물과 스치면서 우측 펜더와 윙 파츠가 파손되었다. 오프닝에서 가장 빨랐던 것은 오지에였고 가츠타, 미켈센이 뒤를 이었다. 누빌은 공력 성능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SS2를 잡아 목요일을 종합 2위로 마무리했다. 목요일을 종합 선두로 마무리한 것은 오지에였다. 누빌이 0.9초 차이로 그 뒤를 이었고 미켈센, 가츠타, 타낙, 포모, 에반스, 파야리, 뮌스터 순으로 첫날 순위를 형성했다.
첫날 사고에 대해 누빌은 “장애물을 건드려 오른쪽 앞 에어로 파츠가 떨어져 나갔어요. 내일 오전 내내 핸디캡이 될 거예요. 이번 스테이지(SS2)에서도 살짝 건드렸는데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요. 아까 이미 사라졌으니까요”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금요일에도 선수들은 계속 체코를 달렸다. 오프닝인 SS3 클라토비는 어제 달렸던 SS2의 반복이었다. SS4는 이번 경기 최장 스테이지인 26.69km의 스트라신(Strašín)이다. 동남쪽으로 더 내려가 16.85km의 슈마브스케 호스티체(Šumavské Hoštice)까지 달린 후 클라토비를 다시 달려 오전 루프를 완료했고, 그룹 재편성 및 타이어 피팅 후에 남은 2개 스테이지를 반복해 하루를 마무리했다. 6개 스테이지 합산 거리는 110.64km. 오전에는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노면 컨디션은 축축한 낙엽으로 덮여 상당히 미끄러웠다.
오프닝 클라토비에서는 오지에를 선두로 도요타 트리오가 가장 빨리 달렸다. 하지만 누빌은 완전치 않은 공력 상태로 종합 2위 자리를 유지했다. SS4를 2번째로 빠르게 달린 누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립감이 없고 스테이지 내내 언더스티어가 심했습니다. 그립이 계속 바뀌어 자신 있게 달리기가 어려웠죠.” 한편, 누빌보다 2.4초가 느렸던 타낙은 “조건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차량 문제라는 뜻이죠. 매우 어려운 랠리입니다”라고 밝혔다.
SS5에서는 미켈센이 코스를 벗어나 말뚝과 충돌하며 랠리카가 대파됐다. 차량 적응 시간이 부족한 탓에 안정적인 언더스티어로 세팅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적기가 발령돼 경기가 중단됐고, 포모 이후 선수들은 모두 10분의 동일한 기록으로 처리됐다.
SS5에서는 타낙이 톱타임을 기록한 가운데 누빌이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누빌은 SS7에서도 가장 빨리 달리며 추격자 오지에와의 시차를 조금씩 벌렸다. 금요일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누빌이 종합 선두. 이대로 유지한다면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 확정도 바라볼 수 있었다. 누빌의 뒤를 이어 오지에, 타낙, 에반스가 그 뒤를 따랐다. WRC2에서는 니콜라이 그리야진(Nikolay Gryazin)이 선두 솔베르그를 추월해 종합 9위가 되었다.
토요일은 20.05km의 그라니트 운트 발트(Granit und Wald)가 오프닝이었다. 독일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에서 끝나는 24.33km의 완전히 새로운 Beyond Borders(국경 넘어) 코스도 준비됐다. 17.35km의 쉐르딩거 인비어텔(Schärdinger Innviertel)까지 달린 후 오후에 다시 반복해 달리는 SS9~SS14 123.46km 구성이었다. 출발 순서는 어제 리타이어했던 미켈센을 시작으로 세르데리디스, 뮌스터 등 랠리1 하위권부터였다. 국경은 넘었지만 짙은 안개와 축축하게 젖은 노면, 낙엽 등이 여전했다.
첫 타자 미켈센이 오프닝 SS9에서 다시 코스를 벗어났는데, 이번에는 풀밭을 달리다가 무사히 복귀했다. 미켈센은 “매우 까다로운 스테이지입니다. 그립이 계속 바뀌어요. 오늘보다는 일요일을 목표로 리듬을 유지하려 합니다. 뒷바퀴로 잔디를 밟는 바람에 스핀해서 시간을 잃었어요”라고 말했다.
포모도 코스를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길을 벗어나면 그립이 거의 없는 풀밭에 닿기 때문에 코스로 빠르게 복귀하기가 쉽지 않다. 오프닝에서 타낙이 톱타임을 기록하면서 선두 누빌과의 시차를 0.8초로 좁혔다.
SS10에서는 에반스가 톱타임이었고 포모는 스핀 후 타이어를 교체하느라 시간을 잃었다. 타낙이 3위로 밀려나고 누빌이 여전히 선두를 유지한 가운데 오지에가 2초 차이로 바짝 추격했다. 오전을 마무리하는 SS11. 누빌이 오르막 고속 코너에서 코스를 벗어나는 바람에 시간을 낭비했다. 풀밭에 뛰어든 누빌이 다시 코스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옴폭한 도랑에 걸려 40초가량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조기 타이틀 확정의 꿈이 물 건너간 순간이었다.
주행 후 누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 페이스 노트가 너무 빨랐어요. 도로가 넓어서 마른 상태에서는 확실히 적합했겠지만, 지금처럼 미끄러운 노면에서는 너무 낙관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스핀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어요. 도랑에서 빠져나가느라 여러 번 시도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달렸습니다.”
오지에가 누빌 대신 선두로 부상한 가운데 타낙이 SS12를 잡으며 추격의 고삐를 당겼다. 오지에와의 차이는 불과 1.1초. 하지만 오지에는 SS13, SS14에서 응수하며 토요일을 선두로 마감했다. 2위 타낙과의 시차는 5.2초였고, 타낙의 8.8초 뒤에는 에반스가 있다. 누빌은 종합 4위로 에반스와는 25.8초 차이. 가츠타, 파야리, 뮌스터, 그리야진, 솔베르그가 그 뒤를 이었다.
일요일의 2개 스테이지는 모두 독일로 구성되었다. 12.17km의 SS15 크나우스 타버트 암 호흐발트(Knaus Tabbert Am Hochwald)와 파사우어 란트(Passauer Land, 14.87km)를 반복해 달렸다. 4개 스테이지는 합산 거리 54.08km로 타이어 선택이 중요했다. 포모와 누빌, 타낙이 소프트 4개에 하드 하나를 고른 반면 미켈센은 올 하드, 오지에와 에반스, 파야리는 하드 3개에 소프트 2개였다.
미켈센은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타이어 펑크로 다시 2분을 잃었지만 전복사고로 리타이어한 파야리보다는 나았다. 타낙은 5번째 기록이었음에도 오지에보다는 빨라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둘의 시차는 1.9초. 파워 스테이지의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는 SS16에서는 가츠타가 톱타임. 선두는 여전히 타낙인 가운데 오지에가 시차를 1.5초까지 줄였다.
그런데 오프닝을 다시 달린 SS17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타낙과 선두 다툼을 벌이던 오지에가 전신주를 들이박고 주행불능 상태가 된 것. 완주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토요일까지의 잠정 포인트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조사 챔피언을 노리던 도요타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에반스가 2위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톱타임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타낙과는 9.4초 차이. 누빌이 3위로 올라서 포디엄에 발을 들였다. 하이브리드 유닛에 문제가 생긴 미켈센은 파워 스테이지 추가 점수에 마지막 희망을 걸며 타이어를 최대한 아끼기로 했다.
최종 SS18을 마친 결과 타낙이 중앙유럽 랠리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탈리아에 이은 시즌 2승째. 에반스가 2위였고 누빌이 3위에 올라 현대팀이 더블 포디엄을 달성했다. 가츠타, 뮌스터, 그리야진, 솔베르그가 그 뒤를 이었다. 누빌과 타낙의 점수 차이가 25점으로 줄어듦에 따라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 승부는 최종전인 일본으로 미뤄졌다. 현대팀 드라이버 두 명의 타이틀 쟁탈전은 누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비좁고 테크니컬한 일본의 도로는 다양한 해프닝과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끝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제조사 포인트에서는 에반스와 가츠타가 슈퍼 선데이와 파워 스테이지에서 분발한 덕분에 낮은 순위에도 불구하고 도요타가 현대팀보다 점수를 더 챙겼다. 이제 두 팀의 점수 차이는 15점으로 줄어 타이틀의 향방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2024 시즌을 마무리하는 일본 랠리는 11월 21~24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서 열린다. 2022년에는 누빌과 타낙이 원투 피니시로 적진에 깃발을 꽂았고, 지난해에는 에반스, 오지에, 칼레 로반페라(Kalle Rovanperä)가 설욕전을 벌였던 장소다. 올해는 양대 타이틀이 모두 이곳에서 결정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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