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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Aug 16. 2023

사랑은 무릎반사 <독립기관>

하루키의 한마디

남녀노소,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작가 하루키. 『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이미 읽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2023년 6월, 좋아하는 작가로 하루키의 꼽은 뒤 『상실의 시대』를 언급하기는 다소 식상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게다가 지금은 러브젤이 보편화돼서 이전만큼 아련하지도 않다(농담입니다).


언제 한 번 하루키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했던 사람, 막상 서점에 가면 어떤 책을 사야 할지 막막했던 사람, 썸녀, 썸남이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현세대에 부응하며, 책 역시 '트레일러'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하루키의 한마디’(혹은 두세 마디)로 작가에게 관심도 가져보고, 썸녀, 썸남에게 점수도 따고, 궁극적으로는 책에 흥미를 느껴보자.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독립기관」

도카이는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다. 쉰두 살에 독신이며, 대인관계에 뛰어난 인물이다. 깔끔하고, 교양이 풍부하며, 머리도 풍성하다. 어째선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재력과 매력을 두루 갖춘 싱글이 됐다. 그의 연애 상대는 주로 유부녀와 이미 연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이 도카이와의 결혼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에는 암묵적인 선이 있었고, 그들은 선을 넘지 않았다. 도카이는 연륜 있고, 감정을 절제할 줄 알며, ‘재수 좋은’ 남자였다. 선 밖의 연인들이 이별을 통보할 때도 쿨하게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느 소설이 그렇듯, 그에게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 위태롭게 줄을 타던 그가 결국 선을 넘어버리(혹은 넘겨지)는데, 다시 말해서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연인관계였던 열여섯 살 연하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도카이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그녀를 더 깊게 좋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보다 미모가 빼어난 여자, 몸매가 좋은 여자, 고상하고 똑똑한 여자도 만나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도카이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도카이를 떠난다. 그는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했고, 허무하게도 죽음에 다다랐다. 전개가 다소 비약적이라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냉철하고 명석하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쉬울 게 없었던 그가 고작 사랑 때문에 죽었으니까. 그 이유는, 사랑은 내 몸의 관장을 받지 않는 어떤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독립기관’은 본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다. 마치 무릎을 치면 다리가 앞으로 나가는 무릎반사처럼.


흥미로운 점은 도카이가 그녀와 일 년 반 넘게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이다. 불륜이었지만, 이는 분명 짝사랑에 빠져버린 고등학생의 상사병과는 다르다. 그는 그녀와 데이트를 했고, 정서적인 교감은 물론 침대에서 살도 맞댔다. 그러나 그녀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게 룰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도카이가 그토록 도망쳐 온 감정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도카이는 사랑에 빠진 뒤로부터 ‘나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사로잡힌다. 그가 성형외과 의사의 능력이나 경력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맨 몸뚱이 인간이 된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어쩌면 그건 도카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지 않는 그녀로부터 느끼는 불안감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도카이를 만나는 이유가 그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에 절망한 것이다.



사실, 도카이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그를 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그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갔다면, 도카이가 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소한 비밀은 여러분을 위해, 문학을 탐독하는 재미로 남겨두기로 한다. 직접 이 단편소설을 읽고 확인해 보자.


로프에 이어진 배는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없다. 하릴없이 끌려만 간다. 모터는 낡고 방향키는 녹슨다. 그 로프가 끊어지는 순간, 도카이는 맨몸뚱이로 망망대해에 표류한다. 우아할 수 없는 침몰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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